[역경의 열매] 조형섭 (6) 선교센터 찾은 난민들에 음식 제공·상처 치료

입력 2015-03-02 02:13
1997년 1월 내전 당시 라이베리아 장애인에게 쌀을 전달하는 조형섭 선교사.

고난을 겪지 않은 사람은 고난 가운데 놓인 사람의 아픔을 이해할 수 없다. 라이베리아에서 내전과 굶주림을 모두 체험하니 도움을 갈구하는 현지인의 눈빛을 도저히 잊을 수도, 외면할 수도 없었다.

그래서 우리 가족은 1994년 내전이 소강상태가 됐을 때 다시 라이베리아로 돌아왔다. 기니와 한국에서 각자 지내던 우리 가족은 이때 다시 만났다. 다시 이곳에 돌아온 이유는 간단하다. 지금이야말로 현지인들에게 가장 큰 도움이 필요한 순간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소강상태라고는 하지만 끝날 듯 계속되는 교전으로 도심을 제외한 지방은 아직 위험했다. 도심 밖에는 5㎞마다 검문소가 있어 자유롭게 이동하기 힘들었다. 난민들은 그나마 안전한 도시로 모여들었고 곧 도심은 복잡한 난민촌이 됐다.

한두 평 되는 흙집이라도 얻은 난민촌 사람들은 사정이 그나마 나았다. 비정부기구(NGO) 등 국제원조단체에서 나눠주는 식량이라도 지원받았기 때문이다. 이마저도 못 받는 이들은 굶주림 속에 허덕였다. 우리는 이들을 찾아다니며 음식을 나누고 치료해줬다.

그랬더니 선교센터 앞으로 매일 40∼50명의 헐벗고 아픈 이들이 찾아왔다. 우리도 가진 것이 거의 없었지만 빈손으로 보내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쌀이 없으면 옷이나 물건을 줘 식량을 구하는 데 보태 쓰도록 했다.

식량이 워낙 부족해지자 우리 가족과 현지인들은 사료나 쥐똥 섞인 쌀을 삶아 먹었다. 하지만 어린이들은 이런 음식을 제대로 소화하지 못해 설사를 하다 죽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나와 아내는 매일 아프다며 선교센터를 찾아오는 이들을 치료하며 복음을 전파했다. 내전으로 불안에 시달리던 사람들은 예수님을 영접하고 예배를 드리며 점차 웃음을 되찾았다. 그러나 마음을 놓을 순 없었다. 매일 밤이면 한두 번씩 총성이 들렸다. 우리 가족은 언제든 급히 피난 갈 수 있도록 식량과 물, 옷가지를 항상 곁에 두고 잠들었다.

96년 부활절 전날 밤이었다. 피난 간 성도들을 만나기 위해 나 홀로 기니에 가 있을 때였다. 평소였다면 몇 번이면 끝났을 총성이 이튿날 정오가 되도록 그치지 않았다. 상황의 심각성을 느낀 아내는 5분 만에 짐을 챙겨 자녀 둘을 데리고 피난길에 올랐다.

아내는 선교센터를 나와 강 건너편에 있는 미국 대사관을 향해 급히 발걸음을 옮겼다. 90년 내전 당시 한국 대사관이 철수했기 때문이다. 강 근처 다리는 반군들이 지키고 있었고 간헐적으로 교전이 벌어져 이동이 쉽지 않았다. 총격전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죽는 상황에서 아내는 미국 대사관으로 갈 방법을 찾기 위해 거리로 나섰다.

피난 가는 이들 사이에서 정신없었던 아내에게 한 현지인 경찰이 ‘조형섭 목사’를 안다며 도와주겠다고 나섰다. 알고 보니 그는 내게 태권도를 배운 제자였다.

제자인 현지인 경찰의 도움으로 아내는 몇 시간 뒤 자녀들과 함께 차를 타고 미국 대사관에 도착할 수 있었다. 미국 대사관에 있다가 한국 정부의 긴급 조치로 안전하게 라이베리아를 빠져나온 아내와 자녀들은 기니에서 날 만나자마자 목 놓아 울었다.

라이베리아 사람들의 영혼과 육신을 살리기 위해 우리가 내려놔야 했던 건 단순히 안전과 편리함뿐만이 아니었다. 재산, 교육, 목숨 등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을 포기해야 했다. 우리 가족은 28년간 이들을 위해 생명을 내건 삶을 살았다.정리=양민경 기자 grie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