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은 싸한 겨울 냉기에 온몸이 시리지만 뒷산 숲에는 어느 덧 봄빛이 일렁인다. 신혼시절 의정부에서 영등포역까지 왕복 4시간이 소요되는 먼 거리를 출퇴근했었다. 그 먼 길이 어찌나 힘들던지 어느 장소 아무 때든지 이유 불문코 잠이 쏟아졌다.
그날은 봉급날이었다. 지금도 그렇지만 만원버스 안에서 앉을 자리를 찾는 건 냇가에 비친 달을 따는 것만큼 어려운 일만 같다. 키 작은 내겐 너무 높은 손잡이를 까치발을 하고서 한손으로 간신히 부여잡고 다른 쪽 어깨에는 월급봉투가 든 가방을 메고 있었다. 종로 5가에서 전동차로 갈아타려고 벤치에 앉아 기다리면서 가방을 열어 본 순간 기겁했다. 봉급이 든 장지갑이 감쪽같이 사라져 버린 것이다. 버스 손잡이를 잡고 깜박 졸았을 때 도난을 당한 모양이었다.
그날 나는 내가 타야 할 전동차를 수도 없이 지나쳐 보내며 어둠이 깔린 그 자리에 앉아 하염없이 울고 또 울었다. 힘이 빠져 살아갈 의욕이 다 사라지는 것 같았다. 왜 하나님께서는 하고많은 사람 중에 하필이면 가난한 내 주머니를 털어가게 내버려 두신 걸까…. 기도인지 원망인지 알 수 없는 말들이 구멍 뚫린 내 가슴 속에서 끊임없이 서성거렸다. 그래도 아주 죽으라는 법은 없는지 코트주머니 안쪽에 숨겨두었던 비상금이 문득 생각났다.
의정부 시내에서 집으로 오는 버스정류장 옆 꽃가게에서 비상금을 몽땅 털어 프리지아 한 다발을 샀다. 그날, 봄 빛깔을 닮은 노랑의 프리지아 향기는 서러운 내 마음과 빈털터리 주머니, 그리고 가난한 우리 부부의 단칸방을 가득히 채우며 그윽하게 번져갔다.
그날의 프리지아 향기는 내 마음을 위로하고도 남을 만큼 충분한, 어쩌면 내가 처음 맡아본 그리스도의 향기였는지도 모르겠다. 입춘이 지나면 볕 바른 뜰 앞에 프리지아를 심고 싶다. 슬프지만 그리운 날의 추억 한 조각을 심어야겠다.
박강월(수필가·주부편지 발행인)
[힐링노트-박강월] 프리지아 향기
입력 2015-02-28 02:3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