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법재판소의 결정으로 폐기된 간통죄는 뿌리가 깊다. 고조선의 기본법인 8조법금(八條法禁)까지 거슬러 올라갈 정도다. 조선시대에는 간통을 저지른 자를 장형(杖刑) 80대로 다스렸다. 유부녀는 90대를 쳤다.
남성보다 여성에게 더 가혹했던 전통은 광복 후까지 이어졌다. 1905년 대한제국 형법대전과 1912년 일제 강점기 조선형사령은 간통한 남성을 처벌 대상에서 아예 뺐다. 간통한 유부녀만 처벌하던 일본 형법의 영향을 받은 데다 남성중심문화가 작용한 결과다.
간통한 남녀를 동등하게 처벌해야 한다는 견해와 모두 처벌할 필요가 없다는 견해는 광복 이후에야 본격 제기됐다. 1947년 법제편찬위원회 산하 형법분과위원회는 ‘남녀평등 이념에 비춰 동일 조건으로 처벌해야 한다’는 형법요강을 작성했다. 이는 정부안으로 채택돼 국회에 상정됐다. 1952년 국회 법사위원회는 간통죄로 처벌해선 안 된다는 취지의 수정안을 내고 표결에 부쳤다. 이듬해 두 가지 안 가운데 정부안이 통과됐다. 재적의원 110명의 과반수인 56표보다 불과 1표 많은 찬성을 얻을 만큼 논란이 치열했다.
간통죄는 여러 차례 고비를 겪었다. 1989년 법무부는 형법개정소위원회 의견을 받아들여 간통죄를 형법에서 빼려 했다. 개인윤리 문제에 해당해 세계적으로 폐지 추세이고, 수사·재판 과정에서 고소를 취하하는 경우가 많아 형벌의 억지 효과가 별로 없다는 게 이유였다.
그러나 1990년 헌재가 6대 3으로 합헌 결정을 내리면서 ‘시기상조’라는 의견이 대두했다. 혼인과 가족생활을 유지·보장하기 위해 필요하다는 논리가 힘을 얻었다. 법무부는 법정형을 징역 2년 이하에서 1년 이하로 낮추고 벌금형을 추가하는 개정안을 제시했지만 이마저 1995년 형법 개정 때 포함되지 않았다. 간통죄 처벌 조항은 그대로 유지됐다.
그럼에도 위헌 논란은 끊이지 않았다. 헌재는 세 차례 더 간통죄 위헌 여부를 판단해야 했다. 1993년엔 기존 합헌 결정을 그대로 인용했다. 2001년 헌재 결정 때부터 변화가 감지됐다. 헌재는 당시 8대 1 의견으로 합헌을 선고하면서 “간통을 형법으로 다스리는 게 지나친 것인지 문제될 수 있지만 이는 시대적 상황과 구성원 의식 등에 의해 결정될 수밖에 없고, 이는 입법의 영역에 속한다”고 밝혔다. 입법권자의 진지한 접근을 요구한 것이다.
2008년 10월에는 헌법재판관 5명이 위헌 또는 헌법불합치 의견을 제시해 처음으로 합헌 의견보다 많았다. 위헌 결정 정족수에 불과 1명이 부족했다. 법무부 장관 자문 기구인 형사법개정특별분과위원회는 2010년 간통죄 폐지 의견을 내기도 했다.
정현수 기자
[간통죄 폐지-존폐 고비 겪은 간통죄] 법 제정 때부터 논란… 헌재, 5번 만에 “위헌”
입력 2015-02-27 02: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