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마당-김준동] 경주 금관총

입력 2015-02-27 02:10

일제 강점기인 1921년 9월 27일 경북 경주시 노서동. 이곳에서 주막을 운영하던 박문환씨는 증축하기 위해 뒤뜰을 팠다. 순간 그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난데없이 금팔찌, 금허리띠, 유리옥 등이 쏟아져 나왔기 때문이다. 유물은 한눈에 봐도 예사 것이 아니었다. 당시 경주경찰서의 일본인 순사 미야케 요사는 소문을 듣고 현장으로 달려갔다. 미야케가 서장에게 올린 보고서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이미 현장에서 오래된 청동 및 금제품, 유리옥 등 유물을 확인했다. 유물로 보아 왕릉이나 귀족 무덤의 중심부라 생각되며 유물을 현장에 보관했으니 지휘를 바란다.” 신라 금관(국보 제98호)이 처음 발굴된 금관총(金冠塚)은 이렇게 세상에 알려졌다.

유물 수습은 단 4일 동안 진행됐다. 그야말로 ‘뚝딱 발굴’이었다. 어처구니없게도 발굴 작업을 주도한 사람은 일본인 경찰서장과 보통학교 교장 등 비전문가였다. 이 중 모로가 히데오는 ‘총독부 박물관 촉탁’이란 지위를 가졌지만 고고학적 지식은 거의 없는 유물 중개상이었다. 모로가는 적지 않은 유물을 빼돌리기까지 했다. 금제 장식을 비롯한 유물 8점은 이른바 ‘오쿠라 컬렉션’으로 들어가 지금은 도쿄국립박물관에 전시돼 있다.

발굴은 부실하기 짝이 없었다. 출토 상황을 보여주는 사진 한 장 찍지 않았고, 도면도 그리지 않았다. 출토 위치, 수량 등의 보고서도 제대로 만들어지지 않았다. 이 같은 마구잡이 발굴은 일제의 고적조사가 식민지배 이데올로기를 만들어내기 위한 목적으로 진행됐기 때문이다. 어떻게든 빨리 파헤쳐 그들이 의도한 유물만을 찾으려했다는 얘기다.

이런 수난을 겪은 금관총이 일제가 흩뜨려놓은 지 94년 만에 재발굴에 들어간다. 국립중앙박물관은 다음주부터 시작되는 정식 발굴을 통해 무덤 주인이 누군지, 고분 구성이 정확히 어떤지 등 아직도 규명되지 않은 의문점들을 풀어낼 예정이다. 광복 70주년인 올해 그 신비가 드러날지 자못 궁금하다.

김준동 논설위원 jdki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