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을 뜻하는 ‘동(洞)’자는 ‘물 수(水)’와 ‘무리 동(同)’이 합쳐진 말입니다. 빈곤국 국민들의 갈증을 해소하고 공동체 정신을 되살리려면 우리의 빗물 기술이 꼭 필요합니다.”
서울대 건설환경공학부 한무영 교수는 물 부족 국가들의 어려움을 해소하기 위해 빗물을 적극 활용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빗물박사’로 유명한 그를 최근 서울대 관악캠퍼스에서 만났다. 한 교수는 “물은 우리가 마시기 전까지 여러 경로를 거치는데, 그 거리가 길수록 오염물질이 섞이기 쉽다”고 했다. 이어 “반면 빗물은 ‘마일리지’가 제로다. 오물도 녹조도 묻지 않은 깨끗한 물”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왜 꼭 빗물이어야 할까.
◇비소로 오염된 우물은 ‘조용한 살인자’=1970∼80년대 방글라데시 정부는 외국 구호단체와 공동으로 우물 수백만개를 팠다. 국민들이 오염된 물을 음용해 수인성 질병이 속출하자 깨끗한 지하수를 공급해 이를 예방하자는 취지였다. 이 야심 찬 프로젝트는 실패로 끝났다. 지하수가 비소에 오염됐다는 사실이 최근에야 밝혀졌기 때문이다.
원인은 히말라야 산맥이었다. 황화물을 머금은 암석이 오랜 기간 풍화되면서 남아시아 지역 지하수에 섞여 들어갔다. 특히 방글라데시는 1억5000만 인구의 절반 가까이가 비소에 오염된 지하수에 노출된 것으로 추정된다. 한 교수는 “비소는 옛날 사약의 원료로 쓰이던 물질”이라며 “비소로 오염된 물을 마시면 당장엔 해가 없어도 나중에 피부암 등 각종 질병을 일으킨다”고 설명했다.
베트남 또한 마찬가지다. 예전부터 베트남 주민들은 메콩강을 식수원으로 사용해 왔다. 하지만 베트남전쟁이 끝난 후 본격적으로 개발이 시작되면서 상수원이 폐기물과 쓰레기로 오염됐다. 그러자 주민들이 우물을 파 비소로 오염된 지하수를 마시기 시작했다. 베트남에 가보면 우물 옆에 빨간 글씨로 ‘As>0.05’라 쓰인 푯말을 흔히 볼 수 있다. 물에 포함된 비소가 0.05ppm을 넘는다는 뜻이다. 국제적인 기준치는 0.01ppm 이하다.
◇빗물, 가장 쉽고 효과적인 해답=한 교수는 그동안 세계적으로 물 부족 현상을 해결코자 많은 방안이 논의됐지만 빗물이야말로 가장 저렴하고 효과적인 대안이라고 주장한다. 그는 “댐을 만들면 좋겠지만 비용이 비싼 데다 파급 범위가 제한적이다. 지하수는 동남아시아에서 볼 수 있듯 오염 우려가 있다”고 말했다. 이어 “상수도 역시 마찬가지다. 예를 들어 아프리카 지역의 수도관은 18개월마다 교체해야 한다. 물에 진흙이 섞여 수도관 벽에 쌓이면서 못 쓰게 되기 때문이다. 고립된 소규모 마을 수준에서는 감당할 수 없다”고 했다.
한 교수는 지난 수년간 전 세계를 돌며 물 부족 지역에 빗물 취수 시설을 설치하는 활동을 해왔다. 베트남과 필리핀, 인도네시아 등 동남아시아부터 에티오피아 탄자니아 같은 아프리카에도 그가 설치한 빗물 시설이 주민들에게 깨끗한 물을 공급한다.
현지 반응은 뜨겁다. 한 교수와 연구진은 2013년 탄자니아의 한 마을을 찾아 빗물 시설을 시범 설치했다. 첫해에는 한국에서 설치비 전액을 지원했지만 이듬해에는 탄자니아 정부가 설치비의 반을 내겠다고 나섰다. 한 교수는 “우물이나 상수도를 설치했다면 이런 반응이 나오지 않았을 것”이라며 “빗물이 물 부족 해소에 효과가 있을 뿐만 아니라 현지 사정에도 잘 들어맞는다는 걸 보여준다”고 했다.
◇빗물을 통한 인권 향상=저개발 지역에서 물은 희소자원이다. 수원지를 둘러싼 마을·부족 간 갈등이 빚어지는 곳도 상당수다. 심지어 외국 구호단체가 설치한 우물을 놓고 분쟁이 생겨 유혈사태로 이어지는 경우마저 나온다. 반면 빗물은 평등하다. 지붕 위에 취수시설만 설치하면 필요한 물을 충분히 얻을 수 있다. 물로 인한 분쟁은 자연히 해소된다.
현지인들의 인권 향상에도 보탬이 됐다. 탄자니아 어느 마을의 여성과 아이들은 물을 뜨느라 20㎏짜리 물통을 진 채 왕복 3∼4시간의 먼 거리를 다녀야 했다. 한 교수와 연구진은 이 마을의 초등학교 지붕에 빗물 시설을 설치했다. 여성과 아이들은 더 이상 물을 뜨러 다니는 노동에 시달리지 않게 됐다. 학교에서 물을 뜨니 자연스레 학생들의 수업 출석률도 높아졌다. 한 교수가 처음 마을을 찾았을 때 교실 안에는 학생이 2∼3명에 불과했지만 빗물 시설이 갖춰진 뒤에는 출석률이 10배 이상 늘었다.
한 교수는 “국제 원조에는 교육·위생·보건·소득 향상 등 여러 분야가 있지만 그보다도 우선 해결돼야 하는 게 물 공급”이라며 “전기는 없어도 되지만 물이 없으면 살 수 없다. 가장 기본적인 생존권이다. 물이 없어 고통 받는 사람들에게 빗물이라는 해결책을 제시한 것”이라고 했다.
조성은 기자 jse130801@kmib.co.kr
[‘물 부족’ 대안을 찾아서-인터뷰] 한무영 서울대 교수 “빗물, 하늘이 주는 가장 평등한 자원입니다”
입력 2015-03-14 02:5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