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민주택이 즐비한 언덕배기 마을에 유독 잘 보존된 한옥이다. 한데 한옥 벽에 전통 양식을 살린 십자가가 눈에 띈다. 115.7㎡(35평) 규모의 이 한옥은 중앙성결교회(한기채 목사)가 교회 옆에 마련한 안식관 및 카페다. 교인 및 데이트족이 즐겨 찾는 명소다.
한옥 골목길 초입엔 '중앙성결교회 교회로 통하는 길'이라는 나무 안내판이 걸렸다. 골목 사이로 태극기가 펄럭였다. 그 길을 따라 15m 정도 가면 제법 규모 있는 예배당이 압도하는데 이 예배당이 108년 전통의 중앙성결교회다.
태극기는 교회가 내걸었다.
이 교회는 산비탈 지형에 위치해 있어 본관과 교육관 각 6층 건물이 보기에 따라 규모가 다르다. 위에서 보면 평범한 예배당이지만 아래서 보면 웅장한 예배당이다. 또 위에서 보면 한양도성 성곽을 담으로 둔 운치 있는 예배당이지만 아래서 보면 그야말로 산동네 예배당이다.
한데 이 예배당을 중심으로 시야를 좀 넓히면 참 독특한 인문지리학적 요소를 지닌 교회임을 알 수 있다. 동대문(흥인지문) 방향으로 패션몰 ‘두타’,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옛 동대문운동장)가 멀리 보인다. 동대문 앞 옛 고속터미널 자리엔 고급 호텔이 들어섰다. 또 불과 몇 해 전만 하더라도 교회 앞엔 120년 전통의 동대문감리교회가 있었다. 근대 병원사에 남을 이대부속병원도 교회 앞이었다. 하지만 지금 교회 앞은 동대문성곽공원 조성에 따라 감리교회와 병원이 이주하고 그 자리엔 공원과 한양도성박물관이 들어섰다.
또 중앙성결교회 북쪽으로는 이승만 박사 거처 이화장, 대학로, 혜화문 등이 자리한다. 동쪽 성곽 아래로는 도심의 달동네 창신동이다. 서쪽으로는 종로길과 한국의 모교회로 꼽히는 연동교회가 눈 아래다.
이처럼 도성 경계에 자리한 중앙성결교회는 마치 한국 근·현대 접점과 같은 위치에서 뭔가 메시지를 전하려는 예언자적 상으로 우뚝한 것이다.
이만신 원로목사 작고 후 첫 예배
22일 주일. 중앙성결교회 예배는 묵직한 분위기였다. 지난 17일 이 교회 이만신 원로목사 별세 후 첫 주일예배였기 때문이다. 고 이만신(1929∼2015) 목사는 한국교회 부흥을 이끈 대표적 부흥사이자 ‘한국교회의 부흥과 일치’를 간절히 원했던 교계 어른이었다. 교계는 ‘한국교회장’으로 기렸다.
이날 예배에서 교회는 추모 영상을 말씀에 앞서 띄웠다. 그리고 말씀 선포에 나선 한기채 목사는 “새벽기도회 때마다 내 이름을 부르며 기도해주시던 한국 교계의 큰어른”이라며 “문제 가운데 허덕이는 우리에게 요셉과 같은 신앙으로 이끌어주셨다”고 회고했다.
이만신 목사와 중앙교회는 한국 성결교의 역사이기도 하다. 이 목사는 1974년 중앙교회에 부임했다. 김시창(80·전 동아건설 상임이사) 장로는 “당시 40대 초반 이 목사의 부흥사적 열정과 긍정적 삶에 대한 말씀 선포는 영적 빈곤으로 방황하던 우리에게 뚜렷한 신앙적 방향을 주셨다”고 기억을 살렸다.
그러한 사역에 중앙교회는 하루가 다르게 성장했다. 서울시청 뒤쪽 무교동 성전은 새신자로 차고 넘쳐 3부 예배로도 감당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교통체증을 유발해 그 일대가 번잡했다. 신유 은사도 매일 일어났다.
유정열(67·한국과학기술한림원 부원장) 장로는 “당시 서촌 체부동이 집이었는데 아버님(작고·유병수 중앙교회 장로) 등과 교회 가기 위해 이른 아침부터 서둘렀던 시절이 엊그제 같다”고 말했다. 사대문 안 교회라 동서남북에서 교인이 몰렸다.
79년 5월 중앙교회는 창립 72주년 기념예배와 함께 무교동 시대 고별예배를 올렸다. 이 목사가 이끈 중앙교회의 부흥은 마치 이 교회가 1910∼30년대 ‘복음전도관’이라는 이름으로 이끈 2차 ‘서울대부흥회’ 같았다.
무교동성전 이전 조건 “사대문 안에…”
중앙교회 역사는 1907년 평양대부흥회 시점과 같다. 부흥운동이 활발했던 평양과 달리 유교적 폐쇄성과 관료주의가 팽배했던 서울은 도시 규모와 다르게 복음 전파가 더뎠다. 성령운동이 항일운동과 충돌하는 것으로 보고 매도하는 분위기였다.
이 무렵 동경성서학원을 마친 정빈·김상준 등이 종로에 동양선교회 예수교 복음전도관을 설립했다. ‘동양선교회’, 즉 한국성결교 출발이자 중앙교회 설립이었다. 이들은 중생 성결 신유 재림의 사중복음으로 부흥운동의 불을 지폈다. 2년 후 교인이 350명으로 늘었고, 1912년엔 함석 지붕을 인 근대식 벽돌 성전을 마련했다. 이 신식 예배당에 서울신대 전신 경성성경학원도 들어섰다.
중앙교회는 광복 전까지 무교동교회로 불렸다. 그 사이 경안복음전도관(현 경기도 광주교회), 독립문복음전도관(현 도곡동 한우리교회), 체부동복음전도관(현 등촌동 영광교회) 등을 분립 개척했다. 평신도운동이 어느 교단보다 활발했던 중앙교회 및 성결교는 이를 바탕으로 1910년대 34개의 전도관이 있었다.
이처럼 성장을 거듭하던 교회 및 교단은 일제 강권통치가 강화되면서 재림 신앙을 인정할 수 없었던 조선총독부에 의해 강제 해산당한다. 일제는 천황이 만군의 왕인 마당에 예수가 왕으로 재림한다는 말씀을 예배당에서 선포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1943년 5월 200여명의 남녀 교역자와 100여명의 평신도가 투옥됐고, 그해 9월 예배중지 명령이 내려졌다. 그리고 12월 29일 자신들이 작성한 ‘해산성명서’에 강제 날인하게 만들었다.
다행히 1945년 광복과 함께 그해 9월 경성성경학원서 교단 재흥(再興) 예배를 드렸으며 이듬해 문을 닫았던 중앙교회가 교회 문을 활짝 열고 광복된 조국 땅 한복판에서 세상을 향해 재림신앙을 설파할 수 있게 됐다.
50∼70년대 중앙교회 무교동 시대는 교인 증가 및 무교동 재개발 사업으로 성전 이전이 본격화됐다. 조용기 김선도 목사 등 신앙의 거장들이 새로운 사역지를 향해 각기 서울 여의도와 영동(지금의 강남) 시대를 열 무렵이었다.
그러나 정동교회 새문안교회 연동교회처럼 역사교회였던 중앙교회는 도성을 벗어난 교회 이전이 쉽지 않았다. 사대문 안에서 역사성을 지켜야 한다는 주장에 힘이 실렸다. 당시 건설사 주역으로 신시가지 영동의 토지구획 정리 사업을 맡았던 김시창 장로는 “당시 나를 포함한 일부 교회 지도자들은 미래지향적 관점에서 강남 시대를 열자고 했다”며 “그러나 지금 생각해보니 하나님께서 중앙교회를 단순히 개교회로 보지 않고 역사 속에서 운동하는 교회로 보고 지금 이 자리에 있게 하신 것 같다”고 술회했다.
79년 중앙교회는 현 자리에서 예배당 기공예배를 드렸다. 지금 교회당 아래쪽 충신동 청산여상(폐교)을 임시 예배처로 삼았다. 당시 식민지를 겪었던 대한민국과 그 도성 서울은 여전히 가난했다. 김 장로는 “지금은 교회 담이나 다름없는 도읍의 성곽이 80년대는 기단 정도만 남아 있을 만큼 관리가 허술했다”며 “그만큼 먹고살기도 힘들어 문화재에 신경쓸 여력이 없었다”고 덧붙였다. 그 역시 가난한 조국을 위해 건설사 간부로 중동 건설 현장을 누볐다. 신앙은 열사에서 그를 지탱하는 힘이었다.
유정열 시무장로는 무교동교회 시대에 미국 유학길에 올랐다. 그리고 돌아와 서울대 기계공학부 교수가 되어 교회를 섬겼다. 그는 김시창 장로 등과 같은 선배 장로의 헌신을 이어받아 한기채 목사와 함께 빛과 소금의 교회를 만들어가고 있다. 두 사람은 “우리 세대는 50대까지 카빈 모의소총을 들고 민방위훈련 등 군사훈련을 해야 했다”면서 “위압이 사회 곳곳에 미치는 시대를 살았는데 우리 같은 기성세대가 그 위압적 분위기를 후대에게 그대로 전하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고 피력했다.
성곽 아래 서민 동네, 교회 손길 늘 필요
중앙교회는 사대문 안에서도 가난한 지역에 거한다. 저소득층이 살아가는 쪽방 사정을 누구보다 잘 알고, 의류 제조·유통의 중심지를 가까이 두고 있어 경제흐름을 읽는 데도 남다르다. 때문에 그들은 교회식당에 잔반통을 두지 않는 것에서도 알 수 있듯 교회가 곳간 채우는 것을 수치로 생각한다. 나누는 삶, 그것이 예수정신이고 그 지체인 교회는 이를 실천해야 한다. ‘중앙교회’라는 대표성 때문이라도 더욱 그러하다고 그들은 확신한다.
글·사진=전정희 선임기자 jhjeo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