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리에서 본 전쟁의 모습은 참혹했다. 수도 근처로 반군이 접근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부두와 시가지는 폭격에 맞아 불탔다. 10∼12세 남짓한 소년병들은 자신의 키만한 총을 든 채 도로를 점거하고 목표물 없이 총을 난사했다. 점차 거리엔 시체들이 쌓였다.
내전이 계속되자 사람들은 먹을 것을 못 구해 죽어갔다. 굶주림에 지친 이들은 해변의 코코넛 나무를 모두 잘라 나무속을 파먹었다. 나무가 하나도 남지 않자 쥐 개 고양이 등 먹을 수 있는 것은 모두 먹었다.
내전 기간에 격전과 소강상태가 반복됐다. 반군과 정부군은 격렬히 싸우다가도 소강상태가 되면 그게 몇 달이든 아무 일 없던 듯이 지냈다. 교전이 멈추면 배나 비행기 등 교통수단이 다시 운행됐기 때문에 그때마다 기니에서 쌀을 사오거나 현지인 성도들과 예배를 드렸다. 라이베리아에 홀로 남은 나는 격전 기간에 조금 남은 쌀을 빗물에 불려 먹으며 근근이 생명을 이어갔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다시 소강상태로 접어들어 기니의 성도를 만나러 갔을 때 놀라운 소식을 접했다. 반군이 선교센터를 주둔지로 삼았다는 것이었다. 영국 BBC 뉴스를 보니 정말 선교센터 앞에 철제 바리케이드와 모래포대를 쌓은 방어벽이 설치돼 있었다.
반군의 수장 찰스 테일러는 콩고타운에 진격해 선교센터를 장악했다. 뒤는 끝없는 늪이요, 앞은 대서양이 펼쳐진 선교센터가 방어와 공격에 최적의 장소라 여겼기 때문이다. 선교센터는 1984㎡(약 600평) 규모로 많은 군인들이 머물기에 적합했고 웬만한 폭탄이 떨어져도 무너지지 않을 정도로 견고했다.
뉴스를 본 뒤 대책을 상의하기 위해 한국으로 돌아가 후원교회를 찾아갔다. 후원교회는 라이베리아 선교를 중단할 것을 제의했다. 나는 “내전은 3개월 내에 끝나며, 고난 속의 라이베리아 성도를 외면할 수 없다”며 맞섰다. 그러자 후원교회는 91년 모든 후원을 중단했다. 후원이 끊기면 자연히 선교를 그만둘 것으로 생각해서였다. 하지만 나는 지인들과 기니로 피신했던 한인들의 지원을 받아 라이베리아로 돌아갔다. 훗날 이들은 내전 중 굶주리는 현지인에게 줄 쌀을 후원해주는 든든한 지원군이 됐다.
콩고타운으로 돌아가니 상황이 변해 있었다. 반군이 주둔했던 선교센터를 정부군이 점령한 것이다. 정부군은 내 존재에 대해 알고 있었다. 군인 가운데 내게 복음을 전해 듣거나 태권도를 배운 제자가 여럿 있었기 때문이다. 이들은 종교 지도자를 우대하는 전통대로 다시 돌아온 나를 해치지 않았다.
6개월 만에 찾은 선교센터엔 전쟁의 상흔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기둥은 무너지고 천장과 벽에는 금이 가 있었으며 센터 앞 대로에는 탄피가 눈처럼 쌓여 있었다. 심지어 방 안의 모든 책에도 총알이 박혀 있었다.
동네 모습은 더 처참했다. 시체 썩는 냄새가 코를 찔렀고 콜레라가 창궐해 내전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은 전염병으로 죽었다. 현지인도 살기 어려운 상황에서 이곳에 남은 외국인은 오로지 나뿐이었다. 살아남은 현지인과 정부군은 자신들과 함께 고통을 겪은 내게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우며 나를 ‘진짜 라이베리아 사람’이라고 불렀다.
‘함께한다’는 말의 의미는 즐거운 시간뿐 아니라 고통의 시간도 같이 견디는 것이다. 지금도 질병이나 굶주림으로 고통 받는 현지인들을 생각하면 옷 한 벌 사는 게 망설여진다. 이 값이면 더 많은 약과 쌀을 나눠줄 수 있어서다. 앞으로도 이 마음이 변하지 않길, 그래서 ‘진짜 라이베리아 사람’으로 평생 살아가길 기도한다.
정리=양민경 기자 grieg@kmib.co.kr
[역경의 열매] 조형섭 (5)“내전의 땅 지킨 당신은 진짜 라이베리아 사람”
입력 2015-02-27 02: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