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경한 목사는 최근 발표한 서울신대 박사학위 논문 ‘한국성결교회 전도부인의 활동과 복음 전도 활성화에 관한 연구’를 통해 일제의 식민지배에 항거했던 성결교회의 전도부인(여교역자)들을 집중 조명했다. 김 목사는 “이들이 나라를 위해 헌신할 수 있었던 것은 경성성서대학(서울신대의 전신) 등에서 전도부인의 자격과 역할에 대해 교육을 받았기 때문”이라며 “오늘날 한국교회의 갱신과 부흥을 위해 여성이 쓰임 받기 위해서는 철저한 신학교육이 수반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일제 강점기 독립투사로 헌신=백신영 전도부인은 3·1운동 직후 비밀결사조직의 결사부장을 맡았다. 1919년 3월 중순 서울에선 정신여학교 교사와 졸업생들을 주축으로 한 ‘혈성애국부인회’, 4월 초엔 ‘대조선독립애국부인회’가 조직됐다. 비밀결사조직이었던 두 곳은 4월 중순 ‘대한민국애국부인회’로 통합됐는데 백 전도부인은 이 단체의 결사부장으로 선출됐다. 하지만 곧 조직이 발각돼 42명의 동지와 함께 체포됐다. 징역 1년형을 선고받고 복역하다 병보석으로 풀려난 그는 성결교회 내 전국연합회부인회를 조직해 교단 여성지 ‘기쁜 소식’을 발간하는 등 문서선교에 헌신했다.
문준경 전도부인은 일제 때 목숨을 걸고 교회를 지켰다. 문 전도부인은 전남 신안군에 100여 교회를 개척하고 한국전쟁 때 순교했다. 일제는 1943년 문 전도부인이 두 번째로 개척한 증동리교회를 강제로 매각하고 대금을 국방헌금 명목으로 빼앗았다. 문 전도부인과 성도들은 교회 회복을 위해 끊임없이 기도했고 해방 이후에는 이를 방해하는 친일파들과 소송까지 하며 맞서 싸웠다.
한도숙 전도부인은 1919년 3월 20일 충남 천안 입장 장터에서 민원숙 황현숙과 함께 만세운동을 일으켰다. 이 사건으로 그는 공주형무소에서 1년간 옥고를 치렀고 이곳에서 류관순 열사를 만났다. 1920년 출소해 한국성결교회의 사역자로 본격 활동했다.
◇목숨 건 신앙고백=오일신 전도부인은 일경의 모진 고문에도 신앙을 지켰다. 그는 1940년 경성성서학원을 졸업하고 금산교회에 파송됐다. 1943년 6월 성결교단 교역자가 모두 검거될 때 그도 포함돼 40일간 구류를 살았다. 일경이 심문하며 “하나님이 더 높으냐 천황이 더 높으냐”라고 묻자 “세상에서는 천황이 높으나 영적으로는 창조주 하나님보다 더 높은 이가 없다”고 담대히 답했다.
중앙성결교회 평신도였던 서용란 여사는 3·1운동에 쓰인 독립선언서를 인쇄했다. 당시 기독여성운동가 임영신(중앙대 설립자)으로부터 독립선언서 원본을 받은 그는 자신의 사무실에서 독립선언서 사본을 수백장 인쇄했다.
김 목사는 이들이 목숨을 걸고 나라를 위해 헌신한 것은 신앙교육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서용란 여사를 제외한 4명의 전도부인은 모두 경성성서학원 출신이다.
김 박사는 “이들은 일제의 압제에 항거했을 뿐만 아니라 당시 가장 소외됐던 여성과 아이들도 돌봤다”면서 “유교적인 남존여비 사상과 일제의 식민지배 속에서 활발히 복음전도 활동을 펼친 전도부인에서 한국교회 여성사역 문제의 해법을 찾을 수 있다”고 분석했다. 이어 “이 시대 여성들도 하나님께 쓰임 받기 위해서는 철저한 신학교육이 필요하다”면서 “강건하면서도 헌신적인 여성의 특별한 은사를 개발하는 다양한 사역모델을 정립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전병선 기자 junbs@kmib.co.kr
일제에 항거 애국부인회 조직·만세운동·독립선언서 인쇄… 복음으로 독립 일군 ‘전도부인’을 배우자
입력 2015-02-26 02: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