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에 항거 애국부인회 조직·만세운동·독립선언서 인쇄… 복음으로 독립 일군 ‘전도부인’을 배우자

입력 2015-02-26 02:12
문준경 전도부인(원 안)이 전남 증동리교회 청년들과 함께 찍은 사진. 문 전도부인은 일제가 강제 매각한 증동리교회를 되찾기 위해 혼신의 힘을 다했다. 문준경 전도사 순교기념관 제공
김경한 목사는 최근 발표한 서울신대 박사학위 논문 ‘한국성결교회 전도부인의 활동과 복음 전도 활성화에 관한 연구’를 통해 일제의 식민지배에 항거했던 성결교회의 전도부인(여교역자)들을 집중 조명했다. 김 목사는 “이들이 나라를 위해 헌신할 수 있었던 것은 경성성서대학(서울신대의 전신) 등에서 전도부인의 자격과 역할에 대해 교육을 받았기 때문”이라며 “오늘날 한국교회의 갱신과 부흥을 위해 여성이 쓰임 받기 위해서는 철저한 신학교육이 수반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일제 강점기 독립투사로 헌신=백신영 전도부인은 3·1운동 직후 비밀결사조직의 결사부장을 맡았다. 1919년 3월 중순 서울에선 정신여학교 교사와 졸업생들을 주축으로 한 ‘혈성애국부인회’, 4월 초엔 ‘대조선독립애국부인회’가 조직됐다. 비밀결사조직이었던 두 곳은 4월 중순 ‘대한민국애국부인회’로 통합됐는데 백 전도부인은 이 단체의 결사부장으로 선출됐다. 하지만 곧 조직이 발각돼 42명의 동지와 함께 체포됐다. 징역 1년형을 선고받고 복역하다 병보석으로 풀려난 그는 성결교회 내 전국연합회부인회를 조직해 교단 여성지 ‘기쁜 소식’을 발간하는 등 문서선교에 헌신했다.

문준경 전도부인은 일제 때 목숨을 걸고 교회를 지켰다. 문 전도부인은 전남 신안군에 100여 교회를 개척하고 한국전쟁 때 순교했다. 일제는 1943년 문 전도부인이 두 번째로 개척한 증동리교회를 강제로 매각하고 대금을 국방헌금 명목으로 빼앗았다. 문 전도부인과 성도들은 교회 회복을 위해 끊임없이 기도했고 해방 이후에는 이를 방해하는 친일파들과 소송까지 하며 맞서 싸웠다.

한도숙 전도부인은 1919년 3월 20일 충남 천안 입장 장터에서 민원숙 황현숙과 함께 만세운동을 일으켰다. 이 사건으로 그는 공주형무소에서 1년간 옥고를 치렀고 이곳에서 류관순 열사를 만났다. 1920년 출소해 한국성결교회의 사역자로 본격 활동했다.

◇목숨 건 신앙고백=오일신 전도부인은 일경의 모진 고문에도 신앙을 지켰다. 그는 1940년 경성성서학원을 졸업하고 금산교회에 파송됐다. 1943년 6월 성결교단 교역자가 모두 검거될 때 그도 포함돼 40일간 구류를 살았다. 일경이 심문하며 “하나님이 더 높으냐 천황이 더 높으냐”라고 묻자 “세상에서는 천황이 높으나 영적으로는 창조주 하나님보다 더 높은 이가 없다”고 담대히 답했다.

중앙성결교회 평신도였던 서용란 여사는 3·1운동에 쓰인 독립선언서를 인쇄했다. 당시 기독여성운동가 임영신(중앙대 설립자)으로부터 독립선언서 원본을 받은 그는 자신의 사무실에서 독립선언서 사본을 수백장 인쇄했다.

김 목사는 이들이 목숨을 걸고 나라를 위해 헌신한 것은 신앙교육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서용란 여사를 제외한 4명의 전도부인은 모두 경성성서학원 출신이다.

김 박사는 “이들은 일제의 압제에 항거했을 뿐만 아니라 당시 가장 소외됐던 여성과 아이들도 돌봤다”면서 “유교적인 남존여비 사상과 일제의 식민지배 속에서 활발히 복음전도 활동을 펼친 전도부인에서 한국교회 여성사역 문제의 해법을 찾을 수 있다”고 분석했다. 이어 “이 시대 여성들도 하나님께 쓰임 받기 위해서는 철저한 신학교육이 필요하다”면서 “강건하면서도 헌신적인 여성의 특별한 은사를 개발하는 다양한 사역모델을 정립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전병선 기자 junbs@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