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조형섭 (4) 슬픈 내전의 선교지 “내가 죽어 묻힐 곳은 이곳”

입력 2015-02-26 02:43
1990년 6월 라이베리아 도심의 국내선 공항에서 마지막 국제선 비행기를 타기 위해 사람들이 몰려 있는 모습.

라이베리아에 도착한 지 3년째 되던 1989년 내전이 터졌다. 라이베리아는 19세기 초 미국에서 해방된 흑인 노예들이 건설한 나라다. 1847년 아프리카 최초의 흑인공화국으로 출범해 안정된 상태를 유지했지만 미국에서 해방된 소수의 노예 출신 정착민과 토착 원주민들 간 갈등이 심해지면서 내전이 발발했다.

본격적인 내전이 시작된 건 89년 12월 반군 지도자 찰스 테일러가 정권 타도를 주장하며 코트디부아르에서 라이베리아 국경지대로 기습공격을 개시하면서부터다. 반군은 정부군과 교전을 벌이며 수도 몬로비아를 향해 진격했다.

반군은 통과하는 마을마다 주민을 무차별 학살하는가 하면 재산을 약탈하고 부녀자를 성폭행했다. 반군을 피하기 위해 라이베리아 사람들은 고향을 버리고 수도로 피난을 왔다.

나는 수도 인근의 콩고타운에서 선교센터를 짓고 있었다. 콩고타운이 수도와 가깝고 대사관 밀집 지역이라 그런지 외지에서 반군을 피해 온 사람들이 많았다. 오지 마을에서 전도했던 성도들도 피난을 와 교인 수는 점차 불어났다.

90년 4월쯤 반군이 수도 인근 마을을 점령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언제 반군이 들이닥칠지 몰라 매일매일 긴장의 연속이었다. 주라이베리아 한국대사관과 한인들은 5월쯤 라이베리아를 떠나기로 결정했다.

나는 성도들에게 인근 국가로 피신할 것을 권했다. 나는 선교사로서 전쟁의 두려움에 떨고 있는 현지인을 내버려 둘 수 없기에 죽을 각오로 라이베리아에 계속 있겠다고 했다. 그러자 한인과 현지인 성도들은 ‘그럼 나도 떠나지 않겠다’고 했다.

이들은 ‘반군과 정부군 누가 수도를 장악하든 길어야 3개월 내에 끝난다’고 생각했다. 정부군이 “반군이 와도 1주일 만에 전쟁을 끝낼 수 있다”고 공언했기 때문이다. 이곳에 터를 잡고 생활하던 사람들은 재산을 지키고픈 생각에 피난을 꺼렸다. 하지만 내전은 쉽게 끝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한인 대다수가 철수하던 5월쯤 나는 아내와 두 아이를 네덜란드행 비행기에 태웠다. 당시 열한 살이던 큰딸은 ‘아빠도 같이 가자’며 울면서 매달렸다. 그럼에도 뜻을 꺾지 않자 아내는 “당신은 정말 고집도 세다”며 울면서 비행기에 올랐다.

가족을 보낸 뒤 성도를 안전한 곳에 피신시키는 데 집중했다. 나는 1주일간 마른 빵을 먹고 땅바닥이나 선교센터 승합차 밑에서 잠을 자며 한인과 현지인 성도 15명을 승합차에 태워 기니로 피신시켰다.

하지만 라이베리아에는 떠날 돈도, 떠날 곳도 없는 500여명의 현지인 성도가 남아 있었다. 기니에서 성도들을 안정시킨 후 다시 라이베리아에 들어갈 방도를 찾았다. 마침 라이베리아에서 약탈한 물건을 시에라리온에 실어 나르는 도둑 배가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 배를 타려고 기니에서 이틀을 걸어 시에라리온으로 갔다.

도둑들은 배에 외국인을 태울 수 없다며 완강히 거부했다. 험상궂게 생긴 한 도둑이 “당신도 물건을 훔치러 가느냐”고 물었다. “당신 나라, 라이베리아를 도우러 간다”고 하니 그는 날 배에 태웠다.

6월쯤 반군에게 국제공항이 파괴된 뒤 임시로 사용하던 국내선 전용 공항에서 타국으로 가는 마지막 비행기가 출항한다는 소식을 접했다. 이 비행기에 일부 성도를 태우고 선교센터로 돌아오면서 ‘주님 앞에 갈 준비를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이제 반군이 무차별 공격을 해오면 죽는 일만 남았다. 선교사인 내가 죽어 묻힐 곳이 라이베리아 땅이라고 생각하니 가슴이 찡했다. 동시에 가족들 얼굴도 아련히 떠올랐다.

정리=양민경 기자 grie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