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마포구 상수동은 대기업의 진출로 밀려난 홍대 ‘인디 문화’의 해방구다. 아기자기하게 카페를 꾸민 바리스타, 자기만의 메뉴로 승부하는 젊은 셰프(요리사) 등은 대규모 유흥가에서 보기 힘든 가게를 차려 이곳에 터를 잡았다. 개성 있는 상점이 가득한 영국 런던의 쇼디치 지역을 연상시킨다.
이곳에 때 아닌 ‘칼바람’이 불고 있다. 작은 가게 앞에 설치한 테라스, 다세대 주택을 개조한 가게의 화장실을 두고 처절한 신경전이 벌이지고 있다. 이 갈등은 임대료를 한 푼이라도 더 받으려는 건물주와 임대업자의 ‘잔꾀’에 뿌리를 두고 있다. 조금만 유명세를 타면 자본력을 앞세워 몰려드는 대형 프랜차이즈에 맞서 ‘젊은 문화의 거리’가 생기를 잃지 않고 버틸 수 있을까.
◇한겨울 ‘테라스 전쟁’=설 연휴 마지막 날인 22일 상수동 한 상가건물의 돈가스 전문점 앞에 손님이 길게 줄을 섰다. 평소 아기자기하던 주변 풍경은 왠지 삭막해져 있었다. 1층 매장 옆 주차장 부지에 설치됐던 비닐 천막이 훌렁 걷힌 채였다. 천막 안에 손님들이 앉던 의자와 테이블은 한쪽에 차곡차곡 쌓여 있었다. 돈가스점에서 지난해부터 ‘야외 테라스’로 운영하던 공간인데, 누군가의 ‘신고’로 구청의 단속을 당해 테이블을 치운 것이다.
인근의 다른 식당도 지난해 11월 구청의 시정명령을 받고 테라스에서 테이블을 치웠다. 현재는 난로와 의자만 놓인 ‘손님 대기석’이 됐다. 이 식당 주인 A씨(38)는 “이 동네 가게 중 야외 손님 대기석이 넓은 곳은 대부분 테이블을 놓고 장사하던 자리”라고 설명했다.
개업 때 신고한 영업장 면적 외에 야외 테라스를 만드는 것은 건축법 및 식품위생법 위반이다. 처음에는 시정명령에 그치지만, 1년 안에 다시 적발되면 영업정지 7일과 과징금 등 처벌이 강력해진다. 마포구는 지난주에도 상수동에서 ‘불법 테라스’ 3건을 적발했다. 이번 겨울 들어 월평균 15∼20건씩 ‘고자질’ 성격의 테라스 민원이 구청에 접수됐다.
오가는 사람들을 보며 커피 한 잔 즐기는 노천카페나 운치 있게 밥을 먹는 테라스를 구청에 신고한 ‘누군가’는 바로 인근 경쟁업소다. 상인들은 야외 테라스가 경쟁 상점 간의 ‘블랙(해코지) 행위’에 이용되고 있다고 말했다.
지하철 상수역 인근에서 카페를 운영하는 B씨(32)는 “장사가 잘되는 다른 가게에 소위 ‘찌르기’를 하는 경우가 많다”며 “구청에 민원을 넣으면 한번에 (테이블) 치워버리니까 장사 잘되는 매장은 하루 매출이 수백만원 줄어드는 셈”이라고 했다. 마포구 관계자는 “신고 받고 단속 나가보면 같은 건물의 2층, 3층 매장에서 신고한 경우도 있었다”고 전했다.
살벌한 신경전의 이면에는 건물주와 부동산 중개업자가 자리 잡고 있다. 시세보다 비싸게 임대료를 부른 뒤 ‘테라스를 놓으라’고 귀띔하고, 테라스 설치비 명목으로 웃돈을 받는 경우가 많다. B씨는 “‘다른 가게들도 다 하고 있다’ ‘테이블 놓고 장사하라’고 부동산 중개업자와 건물주가 슬며시 말을 건넨다”며 “불법임을 알고 있는 임차상인도 매출을 위해 하나둘 야외에 테이블을 놓을 수밖에 없다”고 했다.
상수역 인근에서 일식집을 운영하는 C씨(35)는 “불법 테라스를 치운 뒤 가게 매출은 월 800만원이 줄었지만 테라스 설치 명목으로 건물주에게 올려 줬던 월세는 그대로”라고 토로했다. 반면 인근 부동산 중개업자들은 “절대 테라스 설치를 권유하지 않는다. 업주들이 자체적으로 설치하는 것”이라고 반박했다.
◇‘반지하 가게’와 화장실=임대료와 권리금이 치솟자 ‘반지하 가게’도 많이 등장하고 있다. 다가구주택의 반지하방이나 지하주차장을 개조한 점포가 수십곳이다. 이 때문에 ‘화장실 분쟁’이 심심찮게 일어난다.
지난해 7월 맥주전문점을 열려고 상수동에 가게 자리를 알아본 D씨(30)는 일주일 만에 가계약금 300만원을 포기해야 했다. D씨가 계약한 곳은 면적 33㎡에 보증금 5000만원, 월세 250만원의 비교적 싼 가게였다. 문제는 지하주차장을 개조한 탓에 화장실이 없다는 것. 건물주는 “이전에 카페를 운영한 점주는 이웃 건물 화장실을 빌려 썼다”고 알려줬다. 수천만원에서 수억원에 이르는 권리금이 없어 ‘이 정도는 감수하자’는 마음에 가계약금 500만원을 냈다.
하지만 현실은 달랐다. 이웃 건물주들은 화장실 공동사용을 거부했다. D씨는 “주변 상인들은 ‘이웃이니 같이 쓰게 해주고 싶지만 건물주가 안 된다고 한다’고 말했다”며 “다른 건물주들이 반발해 이전에 카페 하던 사람도 가게를 접었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았다”고 했다.
건물주는 불편하면 화장실 직접 지으라고 했다. 1000만∼1500만원에 이르는 공사비는 줄 수 없다고 했다. D씨는 일주일 만에 간신히 200만원만 돌려받고 돌아서야 했다.
이렇게 ‘젊은 사장’들이 내몰리면서 상수동은 특유의 생기를 잃고 있다. 파워블로거를 동원해 검색 순위를 조작하는 방식으로 다른 가게에 줄서던 손님을 빼앗는 일도 잦다. 상인들은 이를 ‘줄 뺏기’라고 불렀다. 2013년부터 이곳에 터를 잡고 식당을 운영하는 E씨(35)는 “30, 40대 젊은층이 톡톡 튀는 아이디어로 뛰어든 이곳이 점차 신촌처럼 대기업에 잠식당한 동네를 닮아가고 있다”고 말했다.
양민철 기자 listen@kmib.co.kr
[기획] ‘인디 문화’ 해방구에… 살벌한 ‘테라스 전쟁’
입력 2015-02-25 02: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