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7년 2월 4일. 3일간 비행기를 타고 아프리카 라이베리아에 도착했다. 당시 라이베리아는 우리나라 6·25전쟁 후의 모습과 비슷했다. 일전에 심방했던 그 자매가 공항에서 나를 맞았다. 공항 밖을 조금 나서자 낙후된 시골 풍경이 펼쳐졌다.
아내와 아이들보다 먼저 온 나는 가장 먼저 지낼 집부터 구했다. 수중의 돈으로 구할 수 있는 집은 수도 몬로비아에서 1시간 정도 떨어진 외곽에 있었다. 3년간 아무도 살지 않던 집에는 바퀴벌레가 득시글거렸고 벽은 곰팡이로 가득 차 있었다.
하지만 급한 대로 대충 수리를 해 생활했다. 집에 작은 창문이 있었는데 이곳을 출입구 삼아 도둑이 수시로 들어왔다. 도둑은 옷 신발뿐 아니라 밥그릇과 수저까지 훔쳐갔다. 도둑은 하루도 빠짐없이 우리 집에서 이것저것 훔쳐갔는데 고맙게도 내 생명은 해치지 않았다.
이곳에 온 지 4개월이 지난 6월 24일, 아내와 아이들이 도착했다.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선교 사역을 시작했다. 나는 라이베리아에 정착한 한인뿐 아니라 지역 원주민을 모아 ‘성천교회’를 개척했다.
이 시절 아내와 나는 각 지역의 현지인이 사는 상황을 알아보기 위해 오지 마을을 찾았다. 방문한 마을 대부분은 주민들 종교가 이슬람이라며 우리를 거부했다. 매일 같이 아침 일찍부터 마을을 방문해 계속 거절만 당하는 나날이 계속됐다.
그러던 어느 날, 하루 일정 중 마지막으로 도착한 마을에서 우리 부부가 머무는 것을 허락해 주었다. 이때야 비로소 우리는 오지 마을의 삶을 살펴보게 되었다. 마을에는 환자가 많았다. 근처에 갈 만한 병원도 없고 구할 수 있는 약도 없어서였다. 오지 마을로 갈 때마다 차에 약품 의류 쌀 등을 싣고 다니던 나와 아내는 도움이 절실히 필요한 이 마을부터 돕기로 마음먹었다.
오지 마을 주민들은 오랜 굶주림으로 체력이 약해져 작은 상처나 가벼운 감기에도 생명의 위협을 받았다. 우리는 굶주린 이들에게 쌀과 생필품을 주고 말라리아나 상처에 시달리고 있는 환자를 치료했다. 마을 사람들은 잔치가 열린 듯 하루 종일 환호하며 기뻐했다. 이후에도 정기적으로 마을을 방문해 쌀과 약품을 나줘 주고 진료 활동을 펼쳤다. 그러자 갑자기 마을 추장과 원로들이 우리에게 예배당을 지어 달라는 것이 아닌가. 추장은 “우리 마을에 당신이 믿는 하나님이라는 분을 위한 교회를 세워준다면 우리도 그분을 믿겠다”며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추장과 원로의 제안을 받아들이자 현지인들은 우리를 둘러싸고 기뻐했다.
“하나님! 도움이 절실히 필요한 자들을 만나게 하시고, 이들에게 당신의 사랑을 알릴 수 있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예상치 못했던 하나님의 뜻을 체험하며 우리는 자주 감사의 눈물을 흘렸다.
차에 의약품과 생필품뿐 아니라 의류, 소형 발전기, 비디오 등을 싣고 가 오지 마을에서 의료봉사를 한 뒤 기독교 영화를 상영하니 점차 더 많은 마을이 마음을 열었다. 또 더 많은 지역의 현지인들이 교회를 지어 달라고 요청했다. 건축의 ‘ㄱ’자도 몰랐지만 나는 이들의 요청에 힘입어 88년 수도 인근 콩고타운에 선교센터(이후 Korean Liberian Church Mission)를 짓기 시작했다. 몇 십년 후 라이베리아를 넘어 아프리카 전체를 품을 생각으로 기대하며 공들여 건축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이곳에서 내전을 겪으며 죽음의 공포에 맞서야 했다.
정리=양민경 기자 grieg@kmib.co.kr
[역경의 열매] 조형섭 (3) 추장·원주민들 “우리 마을에 교회 지어주세요”
입력 2015-02-25 02: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