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3년 벚꽃이 필 4월 무렵, 당시 내가 섬기던 교회는 총력 전도주간이었다. 종일 교회 홍보를 마치고 밤 11시쯤 귀가하던 중 갑자기 ‘쿵’ 하는 소리와 함께 몸이 하늘로 솟았다. 만취 상태의 오토바이 운전자가 인도에서 걷고 있던 내게 돌진한 것이었다. 왼쪽 다리에 큰 골절상을 입은 상태에서 급하게 병원으로 옮겨졌다. 의사는 가족들에게 수술해도 걷지 못할 확률이 높다고 말했다. 이때 아내는 둘째아이 출산을 앞두고 있었다. 나는 간절히 기도했다. “하나님, 걷게만 해 주신다면 어디라도 부르신 곳으로 가겠습니다.”
발목 관절에 4개의 핀을 박아 고정하는 대수술을 했다. 그때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났다. 수술이 잘 돼 기적적으로 다시 걸을 수 있게 된 것이다. 수술 후 일상으로 돌아갔지만 나는 당시의 기도를 잊지 않고 때를 기다렸다.
그러던 중 우연히 텔레비전에서 빈곤에 시달리는 아프리카 어린이를 보게 됐다. 항생제 한 알이 없어 사소한 상처에도 팔, 다리가 잘렸고 목숨마저 잃었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저곳에 우리 부부가 간다면 저 아이들 몇 명이라도 살릴 수 있지 않을까.’
당시 아내는 육군간호장교 대위였다. 우리 부부가 선교사로 가 나는 복음 전파를, 아내는 의료 봉사를 하면 영혼과 육신을 동시에 살릴 수 있을 것 같았다.
86년 어느 날, 나는 담임목사와 함께 아프리카 라이베리아에서 의류 사업을 하다 일시 귀국한 한 자매를 심방했다. 그 자매는 “라이베리아에서 신앙생활을 하기 힘들다”며 “한인교회가 세워지길 기도하고 있다”고 했다. 이 말을 들으니 아프리카에 대한 마음이 더 커지기 시작했다. 그때 곁에 있던 담임목사가 내게 갑작스런 질문을 던졌다. 아프리카에 가서 선교할 생각이 있느냐는 것이었다. 엉겁결에 나는 “저 같이 부족한 사람도 선교를 할 수 있나요? 할 수만 있다면 좋겠습니다”라고 답했다. 이 말이 라이베리아 선교의 단초가 될 줄 그 누가 알았을까. 그날 저녁 담임목사는 아내와 장모도 참석한 수요예배에서 성도들에게 이렇게 광고했다. “조형섭 목사가 아프리카로 선교를 간다고 약속했습니다.”
그렇게 나는 가족과 한마디 상의도 해 보지 못한 채 라이베리아행이 확정됐다. 목사 안수를 받은 지 4개월 만이었다. 아내는 간호장교로 일하며 두 자녀를 키우는 동시에 8년간 내 신학과정을 물심양면으로 지원했다. 부모와 친지 모두 아내에게 “신학생 남편을 뒷바라지하느라 고생했다”며 “목사 안수를 받으면 모든 고생은 끝날 것”이라고 위로했다. 나 역시 목사 안수를 받은 뒤 ‘앞으로 잘하겠다’며 아내를 위로했었다. 그런데 아내는 퇴근 후 수요예배에 참석했다가 난데없이 남편의 아프리카 선교 소식을 듣게 된 것이다. 얼마나 서운하고 당황했을까. 하지만 아내는 묵묵히 아프리카 선교 행을 지원했다.
문제는 주위의 곱지 않은 시선과 만류였다. ‘별나게 예수 믿는다’ ‘아내와 어린 두 자녀를 데리고 미개한 아프리카로 가는 것이 사실이냐’ 등 별의별 말이 들려왔다. 나는 침묵으로 일관하며 부족한 종을 선교사로 택하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렸다. 아프리카의 열악한 환경에 대한 염려는 크게 되지 않았다. 주님께서 선교사로 택하셨다는 것만으로 배부르고 넉넉한 마음이 들어서였다. 생의 큰 위기를 기회 삼아 머나먼 아프리카로 나를 보내신 하나님. 그곳에서 나는 사람들의 우려와는 달리 하나님의 기적을 몸소 체험했다.
정리=양민경 기자 grieg@kmib.co.kr
[역경의 열매] 조형섭 (2) 사고로 대수술 “주님, 다시 걷게 해주신다면…”
입력 2015-02-24 02: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