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근대교육 선구자, 아펜젤러] (15) 아펜젤러와 청년운동

입력 2015-02-24 02:54
협성회 회보 제일권. 협성회는 이 회보를 통해 토론 주제와 내용을 공개해 한국 계몽에 앞장섰다. 오른쪽은 서구 열강의 각축장이었던 서울 정동 광경. 배재학당역사박물관 제공

한반도의 정세가 불안한 가운데 동학운동은 중국과 일본의 한반도 주둔을 야기한 결과를 가져다주었다. 결국 한반도를 사이에 두고 치러진 청일전쟁 후에는 조선에 대한 중국의 종주권이 흔들리고 있었다. 아펜젤러의 일기를 보면 1894년 12월 말까지 한국 정부군과 일본군이 충북 옥천에서만 300여명의 동학 지도자와 농민들을 잡아 처형시켰다고 기록했다.

하지만 일본의 침략이 확대된 이상 한반도의 정세는 갈수록 불안해졌기 때문에 친청파와 친일파의 갈등은 여기저기서 나오게 된다. 궁 내부에서도 친청파와 친일파의 갈등으로 관련자 1700여명이 관직에서 해임되거나 쫓겨났다고 한다. 친청파였던 명성황후는 일본의 침략을 막기 위해 러시아를 끌어들여 한국의 불안한 정세를 해결하고자 했다. 일본은 한반도 장악이 어려움에 처하자 조선과 러시아 관계를 약화시키기 위해 명성황후를 제거하는 계획을 실행하여 을미사변(乙未事變)을 일으켰다. 이 일로 충격에 빠진 고종은 신변의 위협에 시달려야 했다.

이처럼 급변하고 있던 한반도 정세에 대해 개신교 선교사는 다르게 보았다. 바로 그 어떤 나라보다 한국인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있었던 저력을 바라보았기 때문이다. 아펜젤러의 일기 곳곳에는 풍전등화 같은 상황에서도 한국 기독교인들은 나라를 위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표현하고 있다.

“배재가 이 나라의 등대가 아니면 아무것도 아니다. 깊이 있는 경건성, 다양한 문화를 이 나라에 소개해야 한다. 이들은 기독교인이다. 이 나라의 책임은 우리 한국 기독교인에게 달려 있다.” 책임이 기독교인에게 달려 있다는 것은 한국 기독교인이 가져야 할 소명이 되었다.

소명을 품은 청년운동의 시작

1895년 착공되었던 현 정동제일교회 예배당은 1897년에 이르러 거의 완공 단계가 되었다. 여기서 배재학당의 종강 행사가 있었다. 배재학당 학생들과 고관 대신들, 신분이 낮은 부모들까지 참여한 가운데 학생들은 ‘한국의 독립’에 대하여 열띤 웅변과 토론을 하였는데 내각의 대신과 고관들은 이들의 열정과 비전을 보았고, 희망이 있다는 것을 발견하는 계기를 마련했다. 대신들은 보수와 진보 할 것 없이 학생들이 가지고 있던 소명에 감동을 받았고 “이 어린 학생들이 우리의 자리까지 넘보겠다”는 칭찬어린 고백을 더하기도 했다.

이들은 한국의 계몽과 근대화를 주도했던 배재학당의 협성회(協成會)였다. 협성회는 아펜젤러와 갑신정변으로 도미했던 서재필이 귀국하여 배재학당에 특강과 토론회를 주도하면서 만들어졌다. 협성회는 충군애국과 회원 간 친목, 학문 발전을 위해 구성되었다.

점차 이들은 토론회와 유명 인사의 초청 강연회를 개최하여 민중의 의식을 일깨우는 역할을 했다. 이들은 토론과 참여 계층, 운영방식을 ‘협성회 회보’, ‘매일신문’에 기고하였고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분야의 굵직한 주제들을 날카롭게 통찰하여 이 나라의 계몽과 개혁에 이바지했다.

아울러 교회 내 청년을 중심으로 인천내리교회, 상동교회와 정동교회에 ‘엡워스(Epworth)청년회’가 조직되었다. 엡워스청년회는 미국의 감리교에서 시작된 청년운동으로 신앙과 사회봉사를 실천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었다. 한국의 엡워스청년회는 기도회를 갖고 성경말씀을 공부하고, 논의할 토론 주제를 중심으로 모임을 가졌다. 그리고 ‘죠션그리스도인회보’를 통해 이들의 활동내용을 발표하였다.

‘한국인을 믿는 것이 외국인의 의무다’

개신교가 교회와 학교를 통해 한국의 근대화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는 것은 엄연한 사실이지만 일반 학계에서는 이를 지나치게 축소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독립협회의 정치나 언론 활동은 대부분 기독교인들을 중심으로 활동했다. 물론 독립협회는 시기에 따라 그 규모와 형태가 복잡하여 단순명료화 시킬 수는 없지만 기본적으로 협성회와 엡워스청년회의 구성원이 주도했던 것은 분명하다.

특히 독립협회는 서재필과 이상재, 이승만, 윤치호를 중심으로 정부의 고관이었던 이완용, 안경수, 박정양 등이 참여했다. 이들은 기본적으로 청의 간섭으로부터 독립을 이끌어 반청을 표명했다. 중국 명나라 사신을 맞이하는 모화관(慕華館) 앞에 세웠던 영은문을 허물고 독립문을 세우기도 하여 자주 국권을 표명하기도 했으나 구성원들은 각기 친러, 친일, 친미파 등이어서 제각각 외세를 끌어온다는 논란도 있었다.

이런 가운데 균형 잡힌 시각으로 독립협회 내부의 친일파 이완용 등을 을사오적으로 지목하여 이들의 처단을 요구했던 배경에는 배재학당과 상동교회, 정동교회의 청년들이 있었다. 이들은 의식 있는 기독교인들로, 상동교회의 담임목사 전덕기 박승규 이은덕 정순만 이동녕 이필주는 기독교 민족운동의 대표 주자였다.

배재학당 학생과 교회 청년들이 이렇게 활동했던 배경은 무엇일까. 바로 그 뒤에는 한국을 누구보다 지지하고 응원하였던 아펜젤러가 있었기 때문이다. 아펜젤러는 독립협회가 주도해 세웠던 독립문 정초식에 참여해 ‘한국에 대한 주한 외국인의 의무’로 연설했다. 아펜젤러는 한국을 노리는 서구인과 열강에게 강하고 단호하게 주장했다. 그는 “한국인을 믿는 것이 우리 외국인의 의무이다”라고 주장했다.

그는 “서양문명이 무력으로 세계를 정복할 때 한국의 문명은 이미 꽃을 피웠다”고 주장해 독립문 정초식에 참여했던 서구 열강의 야욕을 향해 일침을 놓았던 외국인이었다. 그는 한국을 진정으로 사랑했던 한국인의 진정한 친구였다.

소요한 명지대 객원교수·교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