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자기 나가라고 하면 어떡해. 설에 갈 데도 없는데….”
진눈깨비가 날리던 17일 오전. 서울 용산구 동자동 쪽방촌 연립주택 입구에 노인들이 급하게 모여들었다. 설 명절을 앞둔 설렘보다 불안한 표정이 역력했다. 손에 든 노란 스티커에는 ‘퇴거를 바란다’는 빨간 글씨가 적혀 있었다. 이 스티커는 지난 5일 건물주가 이 건물의 모든 방에 붙인 것이다.
지상 3층, 지하 1층의 이 건물은 언제, 누가 지었는지 제대로 기록이 남아 있지 않다. 1945년 일제 해방 직후에 생겼다는 이야기만 전해져 온다. 지금은 42가구가 산다. 대부분 60∼80대 독거노인들로 기초생활수급자가 많다. 이들은 나라에서 주는 수급액으로 월세 15만원을 겨우 메운다. 6㎡ 남짓한 방은 성인 한 명이 누우면 꽉 찬다. 주민들은 “제대로 살림을 들이는 건 엄두도 못 낸다”고 했다.
건물주가 주민들에게 알린 내용에 따르면 이 건물은 지난해 12월 안전진단에서 ‘D등급’을 받았다. 이 등급을 받으면 보강공사를 하거나 불가피한 경우 건물을 철거해야 한다. 주민들은 ‘다음달 15일까지 나가 달라’는 통보를 받고 나서야 이런 사실을 알았다. 부랴부랴 옮길 곳을 찾고 있지만 대부분 마땅한 대책이 없다.
정오가 가까워지며 햇살이 강해졌지만 건물 안은 여전히 어두웠다. 전날 내린 비가 건물 안까지 들이쳐 바닥 곳곳에는 아직 물 자국이 남아 있었다. 오래된 건물 특유의 쾌쾌한 냄새도 났다. 창문은 깨지고 녹이 슬어 잘 열리지도 않았다. 2층의 한 방문에는 ‘근조(謹弔)’라고 쓰인 하얀 종이가 붙어 있었다. 누군가 이곳에서 외롭고 가난하게 살다 세상을 떴다고 했다.
당장 몸 누일 곳이 없게 된 주민들은 난생 처음 ‘비상대책위원회’라는 걸 꾸렸다. 나름 ‘고참’이고 그나마 건강한 김병택(79)씨가 위원장을 맡았다. 김씨는 “어제 건물주와 면담을 하기로 했는데 안 왔다”며 “건물주는 건물이 위험하다는 걸 알면서도 지난해 8월까지 세입자를 받았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건물주는 “이사 비용을 지원해 줄 순 없지만 3월 방세는 받지 않겠다”고 주민들에게 전한 상태다.
주민 A씨(71)는 “몇 달 전에 결정된 일을 그간 공문 하나 없이 있다가 이제 와 나가라는 스티커만 달랑 붙여 놓으니 속이 썩어 들어간다”며 말을 흐렸다. 14년째 이 건물에 살고 있다는 시각장애인 김모(61)씨는 “절망적이다. 막막하다”고 했다. 그는 “주변 집들은 보증금으로 최소 100만원은 달라고 하는데, 당장 이사비도 없다”고 토로했다.
주민들은 어디에다 호소해야 할지도 모른다고 했다. 퇴거 통보 스티커에 공사 담당자 연락처가 적혀 있었지만 누군가 일일이 칼로 오려냈다. 용산구 관계자는 “이 건물은 사유재산이라 시나 구의 안전진단 관리 대상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글·사진=양민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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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거리로 나앉는 설… ‘서울 동자동 쪽방촌 42가구’ 퇴거 딱지 받아들고 맞은 명절
입력 2015-02-18 02:4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