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브라함의 부친 데라는 우상을 섬기는 일을 했다. 아브라함은 믿음을 지키기 어려운 환경 속에서 성장했으나 하나님 말씀에 순종해 고향을 떠나 ‘믿음의 조상’이 됐다. 나는 아브라함과 같은 복을 달라고 늘 기도해 왔다. 그동안 이 기도의 열매를 체험하며 살아왔고 국민일보 ‘역경의 열매’ 지면을 빌어 감사로 점철된 삶을 나누고자 한다.
나는 1952년 경북 안동 유교 집안의 10남매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우리 집은 수많은 제사를 드렸지만 나는 큰 어려움 없이 교회에 다닐 수 있었다. 아버지가 “맏아들이 제사를 이으니 죽어도 굶을 걱정은 없다”며 교회 출입을 허락해 주셨기 때문이다. 하지만 뿌리 깊은 유교 집안인지라 신학대 진학에 도움을 기대하긴 어려웠다. 입학금과 학비를 마련하기 위하여 고심하던 중 당시 정부가 전국 산에서 아카시아나무를 제거하고 밤나무로 대체하는 사업을 펼친다는 소식을 들었다. 나는 등록금을 마련하기 위해 이 국책사업에 지원했다.
비탈진 산에서 하루 종일 곡괭이와 삽으로 땅을 파고 밤나무를 수백 그루 심었다. 하도 삽질을 하느라 물집이 많이 잡혀 손바닥에 염증이 생겼다. 나머지 학비를 마련하기 위해 탄광에서도 일했다. 하지만 1주일 만에 다리를 다쳐 병원에 입원했다. 이 같은 고생을 견딘 후 그토록 소원하던 신학대에 입학했다.
하지만 힘들고 외로운 상황은 계속 이어졌다. 동료 신학생들은 입학과 동시에 교회에서 사역을 시작했다. 내게는 교회를 소개해 줄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나는 그저 주말마다 기도원에 올라가서 금식하며 기도할 수밖에 없었다. “주님! 제발 섬길 수 있는 교회를 연결해 주옵소서.”
수개월 뒤 한 교회에서 연락이 왔다. 교역자 사례비가 전혀 없는 미자립교회였다. 감사하는 마음으로 열심히 섬겼더니 교회에서 첫 달은 교통비를, 이후에는 생활비를 지원해 줬다. 어려움도 있었지만 신학 공부를 하며 교회를 섬겼던 이때가 참 행복했던 시절이었다. 목회의 기본을 배웠고 독실한 신앙인이자 간호장교인 아내와 만나 결혼했던 시기이기 때문이다. 아내는 나와 함께 선교지에서 살며 현지인들을 살리고 위로하는 일을 감당하고 있다.
내가 28년간 사랑하며 섬긴 선교지는 오랜 내전을 겪은 아픔의 땅이다. 최근엔 세계를 공포로 떨게 했던 에볼라의 진원지이기도 하다. 이곳의 이름은 ‘라이베리아’다.
나는 선교지에서 세 가지 원칙을 정하고 이를 실천하려고 노력했다. 첫째, 한 알의 밀알(요 12:24)이 땅에 떨어지듯 영혼을 살리는 일에 모든 것을 희생한다. 둘째, 하나님이 부르신 사명에 따라 산다. 셋째, 가지고 있는 모든 재능을 남김없이 하나님의 일을 하는 데 다 쏟는다.
세 가지 선교 원칙의 근본은 바로 사랑이다.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그들을 사랑하고 나를 희생할 때, 하나님은 선교지에서 변화를 이끌어내셨다. 나는 하나님의 주권을 믿는다. 그러기에 모든 생사와 소유를 하나님께 맡긴다. 모든 것은 하나님이 주관하신다.
정리=양민경 기자 grieg@kmib.co.kr
◇약력=1952년생, 81년 대구신학대학 졸업, 84년 총회신학대학원(서울 사당동) 졸업, 87년∼현재 예장합동 총회세계선교회(GMS) 파송 선교사, 라이베리아태권도협회 대표이사, 라이베리아 KLCM 선교회 대표, 2013년∼현재 밀알복지재단 라이베리아 책임프로젝트매니저.
[역경의 열매] 조형섭 (1) 28년 사랑으로 섬긴 선교지 ‘에볼라’로 큰 고통
입력 2015-02-23 02:19 수정 2015-02-23 19: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