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초 프랑스 파리에서 시사 주간지 ‘샤를리 에브도’의 직원과 경찰 12명이 이슬람 테러단체인 알카에다에 의해 총기 난사를 당하는 참극이 발생했다. 이어 이슬람 수니파 근본주의 무장단체 이슬람국가(IS)는 무고한 민간인들을 계속 처형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최근에는 인질로 잡힌 요르단 조종사를 산 채로 불태우는 끔찍한 만행을 저지르는 등 지구촌의 공분을 사고 있다.
샤를리 사태가 터졌을 때 먼저 프랑스와 전 세계는 한목소리로 ‘표현의 자유’ 훼손을 크게 우려했다. 표현의 자유는 반드시 존중돼야 한다. 그러나 언론 매체의 생명과 같은 표현의 자유란 기성의 권위나 획일화된 신념 체계를 되돌아보게 하거나 지배적 가치에 맞서 다른 견해를 말하는데 미덕이 있다.
사회적 약자들을 깔보거나 비아냥거리는 대신 진실과 공익을 추구할 때 비로소 표현의 자유가 유효한 것이 아닐까. 국가인권위원회가 최근 ‘표현의 자유’를 내세워 탈북자 단체의 대북전단 살포를 막아서는 안 된다고 한 결정이 과연 ‘국민안전’이라는 더 큰 공익에 부합한 것인지 매우 걱정스럽다는 지적과 같은 맥락이다.
그러나 더 큰 문제는 샤를리 테러를 일으킨 범인인 쿠아시 형제나 IS가 부르짖는 ‘종교’ 역시 반드시 공공성의 맥락에서 다뤄져야 한다는 것이다. 오늘날 세속주의 국가, 다원화 사회에 살아가면서 ‘나는 무슬림이다’라고 선언한다면, 그것은 신앙과 표현의 자유이면서 동시에 공공의 비판 대상이 될 수 있음을 각오해야 한다(물론 증오나 조롱은 옳지 않다).
오늘날 교회들이 젊은 층의 급격한 이탈을 염려하고 있는데, 그것은 종교가 공공성을 상실하고 있기 때문이다. 일례로 교회가 ‘이신칭의(以信稱義·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로움을 얻는 것)’를 가르치면서 과연 목회세습이 가능한 것일까.
하나님이 인간 구원을 위해 유대와 로마제국 안에서 공공성을 끝까지 밀어붙인 것이 곧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이었다. 특히 예수님은 당시 ‘고르반’(하나님께 드리는 특별한 종류의 구별된 제물)과 관련된 논쟁 사건에서 종교와 공공성이 분리된 바리새 전통을 강력하게 비판하고 있다(막 7:9∼13). 당시의 제사종교는 ‘부모공경’(제5계명)을 무력화하면서까지 ‘고르반’이라는 근본주의 종교법을 우선규정으로 시행하고 있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들이 종교와 공공성을 분리하고 이원화하면서 사실상 하나님 말씀에 반하고 있다고 경고했다.
그래서 ‘살인하지 말라’라는 제6계명을 재해석하면서도 예수님은 당시 종교법이 규정한 정결 제사보다 먼저 사람들과의 화해가 우선이라는 계명의 본질, 즉 종교와 공공성의 일치를 더 중요하게 강조했다(마 5:23∼24).
샤를리 사태나 IS문제는 철학자 알랭 바디우의 지적처럼 ‘계층 간 갈등’에 가깝다. 쿠아시 형제는 프랑스에서 태어난 ‘순수 프랑스인’이었지만 ‘방리외’라는 대도시 외곽의 이민자 분리지역에서 불평등과 종교차별로 소외된 채 살아가며 소매치기로 전전하다 무슬림 급진주의자가 되었다. 그래서 프랑스 지식인들은 “테러범들 역시 우리가 키운 아이들이다”라며 이슬람 극단주의에 빠지도록 방치한 국가와 사회의 책임을 통감하기 시작했다.
종교와 공공성의 정점은 사회경제적 약자에 대한 관심과 배려다(약 1:27). 요즘 한국의 개인과 가계는 1100조원에 육박하는 부채로 파멸 직전에 있는데, 부자 기업들은 480조원의 유보금을 쌓아 놓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엄청난 부를 쌓아둔 기업들은 지속적으로 정규직을 줄이고 임시직과 일용직을 늘리면서 사회적 약자들의 목을 더욱 조르고 있다.
“내일이면 우리는 더 강해지고 더 연대하고 가까워질 것을 약속하지만, 오늘은 당신들과 함께 눈물을 흘립니다.” 샤를리 테러사건 직후 탐욕의 현대문명을 참회하면서 뤽 베송 감독이 소외된 젊은 무슬림들을 향해 건넨 위로가 비단 그들만을 위한 메시지는 아닌 것 같다.
정종성 교수(백석대 기독교학부)
[시온의 소리-정종성] 종교와 공공성
입력 2015-02-18 02:3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