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김봉래 (12) 암으로 출소 무기수 “목사님 저 살아났어요”

입력 2015-02-17 02:41
2010년 홍성교도소 무기수 대상 세례식에서 조영래 애본교회 은퇴목사와 김봉래 목사(왼쪽 서 있는 이)가 세례를 주고 있다.

재소자들 중엔 속을 썩이는 사례가 종종 있다. 그중에 자해하는 경우가 발생하는 중구금 시설 교도관들에 따르면 못으로 자신의 발등을 찍고 바늘로 눈을 꿰매고 칫솔을 먹는다 한다. ○○○번 병만이(가명)가 그랬다.

어느 날 병만이와 마주쳤다. 그는 나를 보더니 다짜고짜 “전도사요? 그런데 왜 나랑 상담 안 하오?” 했다. 나는 다음 날 그와 만나기로 했다. 하지만 그는 그날 침핀으로 자신의 눈을 찔렀고 밤중에 소동을 피워 만날 수 없었다. 그는 며칠을 못 가 칫솔을 먹고 외부 병원으로 실려갔다 돌아왔다. 어쩌려고 그러는지 알 수 없었다.

나는 얼마 후 병만을 만나러 그의 두 평 남짓한 독거실에 들어갔다. 이는 수형자 상담 원칙에 어긋났지만 나는 병만에게 예수님의 사랑을 보여주기 위해 들어갔다. 담당 직원도 놀라 문을 열어놓고 주시했다. 나는 병만의 이야기를 들어주었다. 다음 날엔 성경책을 사주고 읽어보라고 권했다. 하지만 며칠이 안 돼 병만은 자신의 손가락을 문에 넣고 닫아버려 봉합수술을 받았다.

나는 다시 병만의 독방 문을 열고 들어가 기도했다. 붕대로 감겨 있는 그의 손가락을 보면서 다시는 그러지 않겠다는 약속도 받았다. 병만도 뉘우치는 것 같았다. 그는 성경을 필사하겠다고 했다. 나는 그가 변화되기를 기도했다. 하지만 그는 다른 교도소로 이감됐다. 나도 2005년 정년퇴임했고 그해 목사 안수를 받았다. 나는 경교대교회를 맡으면서 담안 형제들을 위한 사역을 이어갔다.

그러던 어느 주일. 예배를 마치고 출입문을 바라보는데 병만이가 서 있는 게 아닌가. 나는 깜짝 놀랐다. 그는 무기수였다. 16년 수감생활을 했으니 아직 형기가 남아 있었다. ‘설마 탈옥을 했나’ 생각하며 그에게 자초지종을 물었다. 그는 담낭암 진단을 받고 형 집행정지로 나왔다고 했다. 의사 말로는 6개월밖에 살 수 없다고 했다.

모든 것을 체념한 표정이었다. 그는 교도소 안에서 느낀 서운함 때문에 출소하자마자 일을 벌이려 했다고 한다. 어머니에게도 감정이 있어서 모든 것을 끝내려고 했다. 그런데 출소해보니 어머니는 하얀 백발이 되었고 얼굴에 주름살이 깊이 패어 있었다. 그 모습을 보고 가슴이 아팠다고 했다. 고민하던 그는 나를 만나러 찾아온 것이다.

나는 그에게 기도원으로 가라고 했다. 그는 강남금식기도원에 이어 천마산기도원, 오산리최자실기념금식기도원 등을 전전했다. 그러다가 원자력병원에 있다는 연락을 받았다. 수술 한 번 받고 싶어 갔다고 했다. 병원을 찾았을 때 병만은 말했다. “목사님, 저 살았어요. 악성이 아니라 양성이래요. 제 목숨 참 모질지요.”

병만은 그때 나에게 묵직한 박스를 건넸다. 상자를 열어보니 흉기가 들어 있었다. 나는 놀라서 얼른 닫았다. 그는 범행을 저지르려고 물색하다가 탈진해 병원으로 실려왔다고 했다. 그러면서 자기가 형기를 다 마치는 날 흉기를 돌려달라고 했다. 그것으로 간증을 다니겠다고 했다.

병만은 재수감됐다. 대전교도소에서 한 차례 소동을 일으켜 교무과 직원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돈이 필요하다고 했다 한다. 나는 송금을 하고 병만을 만나러 갔다. 그러나 징벌 기간이라 면회가 허락되지 않았다. 나는 발길을 돌리면서 하나님께 그의 변화를 위해 진심으로 기도했다.

병만은 어디 성한 곳이 없다. 심지어 양쪽 발목 아래 아킬레스건에 상처를 내 자신을 혹사시켰다. 무기수인 그는 언제 출소할지 모른다. 모든 것을 내려놓고 하나님만 의지하며 살아가길 바랄 뿐이다. 정리=신상목 기자 smshi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