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대학생 단톡방, 낯 뜨거운 뒷담화

입력 2015-02-16 02:09
지난 13일 페이스북에 올라온 익명의 게시 글. 서울 K대 남학생들의 단톡방에서 벌어진 성희롱 대화를 성토하고 있다. 페이스북 캡처

“걔(여자 후배)는 가슴은 D컵인데 얼굴이….”

차마 입에 올리기 민망한 대화가 지난해 5월부터 서울 K대의 학과 소모임 ‘단톡방’(단체 카카오톡방)에서 오르내리기 시작했다. 남학생들로 이뤄진 모임의 단톡방에 여자 선후배의 외모와 몸매 등을 평가하는 말이 하나씩 올라오더니 어느새 낯 뜨거운 표현이 등장했다.

지난해 12월까지 계속되던 ‘불량 대화’는 단톡방 멤버 중 한 명을 통해 대상 여학생들에게 알려지면서 민낯을 드러냈다. 그 대화창을 캡처한 사진까지 폭로됐다. 문제가 불거지자 이들은 지난 12일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 사과문을 올렸지만 학교 측은 비상대책위원회를 소집하고 징계 검토에 착수했다. 사적 대화라도 명백한 성희롱이기 때문이다.

대학가 단톡방, 학교마다 학과마다 동아리마다 수없이 개설돼 있는 그곳에선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걸까. 선후배들이 얼굴을 맞대고 인사하던 옛 ‘과방’ ‘동아리방’의 역할 중 많은 부분을 지금은 단톡방이 대신하고 있다. 취미와 정보를 공유하고, 함께 공부와 과제를 하기 위해 적게는 서너 명에서 많게는 100명 이상 참여하는 공간이다.

요즘 대학 신입생들은 합격 통보를 받자마자 ‘수만휘’(수능만점 시험지를 휘날리자) 같은 수험생 커뮤니티나 대학 커뮤니티에 “단톡방에 초대해 달라”고 부탁하는 글을 올린다. 합격 발표가 난 날부터 각 게시판은 이런 글로 도배된다. 서울 K대 신입생 한모(20·여)는 15일 “학교 정보를 손쉽게 얻을 수 있고 선배들과 친해질 수 있어 학교와 학과 단톡방에 들어가려는 신입생이 많다”고 말했다.

그러나 마냥 좋지만은 않다. 폐쇄된 공간에서 그들만의 대화가 이뤄지다 보니 부작용이 생긴다. 성희롱부터 후배 군기잡기, 교수 뒷담화 등 요지경이 펼쳐지고 있었다.

서울 S대의 한 학부 남학생들은 자기들만의 단톡방을 만들어 여자 신입생 ‘품평회’를 한다. 얼굴과 몸매에 점수를 매겨 ‘A급’ ‘B급’ 등으로 분류한다. 얼굴을 맞대고선 하기 어려운 말을 폐쇄공간에 숨어 내뱉는 것이다.

올해 서울의 다른 K대를 졸업한 임모(27)씨는 단톡방 하면 신입생 시절 군기를 잡던 선배들이 떠오른다고 했다. 군대를 다녀온 복학생들은 ‘선배에게 인사할 땐 호주머니에서 손을 빼라’ ‘1분 안에 답장을 하라’ ‘선배에게 대답할 때는 ‘∼요’자를 붙이지 않는다’ 같은 말을 단톡방에 쏟아냈다.

서울 S대 박사과정 A씨는 연구실 동료들과 지도교수에 대한 ‘불평방’을 카카오톡에 만들었다. ‘(교수가) 부부싸움한 거 아니야?’ ‘위에서 당하고 화풀이하나 보지’ 등의 불만을 쏟아내는 공간이다.

친목을 위해 만들었지만 후배들은 이름만 걸어둔 ‘빈껍데기’ 단톡방도 있다. 서울의 또 다른 K대 졸업생 164명은 올 초 단톡방을 개설했다. 옛 선배부터 최근 졸업생까지 불러 모았다. 처음에는 서로 격려하고 모임도 자주 갖는 등 좋았다고 한다. 하지만 어느새 후배들은 눈치가 보여 방을 나가지도 못한 채 조용히 ‘알림’을 꺼두는 단톡방이 됐다.

계명대 사회학과 임운택 교수는 “단톡방은 자주 만나기 힘든 대학생들이 빠르고 쉽게 소통할 수 있다는 순기능이 있지만 타인에 대한 비방, 성희롱, 욕설 등 부작용도 무시할 수 없는 수준”이라며 “지성의 공간인 대학 캠퍼스에서 이런 일이 생기는 건 단톡방이 갖는 ‘폐쇄성’ 때문”이라고 말했다.

임지훈 기자 zeitgeist@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