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워싱턴DC 의사당 뒤편에 자리 잡은 ‘미 의회도서관(The Library of Congress)’은 미국이 경제력이나 군사력에서만 세계 최고가 아니라는 것을 여실히 보여준다. 세계 최대 도서관인 이곳이 보유한 자료는 책과 문서 3680만건을 포함해 1억5800만점에 이른다. 470개 언어로 된 인쇄물이 모여 있다. 1800년 의원들의 도서실로 시작한 이 도서관에는 지식과 정보에서도 세계 최고가 되겠다는 미국인들의 꿈과 야심이 담겨 있다.
한국어 책과 문서도 24만점에 이른다. 하지만 의회도서관이 러시아를 제외하고 가장 방대하고 희귀한 북한 자료를 보유하고 있는지 아는 이는 많지 않다. 북한을 연구하는 학자들이 보물창고이자 광맥(鑛脈)으로 여기는 곳이 이 도서관이다. 이곳이 보유한 북한 자료는 268종의 정기간행물을 포함해 1만점. 특히 6·25전쟁으로 북한에서도 찾기 어려운 광복 이후부터 1953년까지 북한에서 발행된 잡지와 문건들이 핵심으로 꼽힌다.
◇남북한에도 없는 유일 자료들=13일(현지시간) 미 의회도서관의 아시아열람실에 한국 전문사서 소냐 리씨가 서류봉투에 싸인 북한 희귀본들을 조심스럽게 들고 나왔다.
1947년 2월 28일 노동신문사가 발행한 잡지 ‘근로자’ 3·4호에는 전 해인 1946년 1차 당대회 때 채택된 북조선노동당 강령이 수록돼 있다. 당시 소련파의 거물 허가이(許哥而)가 쓴 ‘당 정치사업에 대한 제 과업’이라는 글도 있다.
1949년 10월호 북조선민주여성 총동맹중앙회가 발행한 잡지 ‘조선여성’의 표지에는 북한 여성과 옛 소련인으로 보이는 금발여성이 함께 있어 눈길을 끈다. 당시 북한에 압도적이었던 소련의 영향력을 단적으로 알 수 있다. 북한 여성들에게 옛 소련의 고마움을 세뇌시키는 내용이 대부분이다.
문화선전성이 발행한 1952년 5월호 ‘선동원수첩’은 6·25전쟁이 한창일 때 북한 주민과 인민군의 투쟁의식을 고양하기 위해 발간한 것으로 보인다. ‘스탈린 대원수로부터 김일성장군에게 보낸 전보문’이 수록돼 있다. 여기서 스탈린은 “조선인민에게 식량이 요구된다는 것을 나는 알게 됐습니다. 우리에게는 시비리(시베리아)에 밀가루 5만t이 준비돼 있습니다”며 “우리는 이 밀가루를 선물로 보낼 수 있습니다”라고 했다. 이에 김일성은 “조선인민의 절박한 요구에 대한 당신의 심심한 배려에 무한히 감격했습니다. 이는 조선인민에 대한 위대한 소련인민의 또 하나의 형제적 원조의 표현입니다. 우리는 당신의 제의를 무한한 감사로 받는 바입니다”고 화답했다.
이어지는 내각결정 67호 ‘스탈린 대원수로부터 기증한 양곡을 접수 처리할 데 관하여’는 이 기증받은 밀가루의 처리 문제를 밝힌 것이다. ‘1. 전재민과 재해 농민들의 영농조건을 보장하기 위해 이들에게 기증양곡을 무상분배한다. 2. 양곡 사정이 완화됨에 따라 앞으로 추수기에 납부할 농업현물세 중에서 1950년도와 그 이전의 미납량은 일체 이를 면제한다’는 내용이다. 이 책에는 ‘5월의 노래’ ‘승리의 5월’이라는 두 곡의 가사와 악보도 실려 있어 사료적 가치가 높다. ‘적의 세균만행에 대해 더욱 경각심을 높이자’는 내용도 포함돼 있어 미국이 세균전을 했다고 선동해 반미 감정을 고양시키려 했음을 알 수 있다.
전쟁 중 남한 빨치산들의 문건도 남아 있다. ‘조선노동당 전라남도도당 선전선동부 교양과 제공’으로 돼 있는 ‘학습재료’ 1호이다. 1950년도에 발행된 이 책의 표지는 실로 묶여져 있다. 1951년 발행된 ‘공장 농촌 세포 학습재료’ 4호, 1948년 발행된 ‘선동원수첩’ 5호, ‘조국’사에서 나온 ‘남조선 문제’ 등도 유일본이다. 북한 정권의 창건과정과 한국전 당시 북한의 움직임을 알려주는 자료들이다.
◇종이 변색되고 부스러지고···디지털화 시급=미 의회도서관이 한국 자료를 수집하기 시작한 것은 1950년부터다. 6·25전쟁으로 한국에 대한 정보와 지식이 급히 필요해 본격적으로 자료를 모으기 시작했다. 희귀 북한자료들은 북한에 진주한 미군이 노획했거나 빨치산과 전투를 벌인 한국군이 획득한 문건들이 미군의 손에 들어갔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 자료들이 언제, 어디서, 어떻게 입수됐는지에 대한 설명은 남아 있지 않다. 사서 리씨는 “해방 이후 1953년까지 자료들은 전쟁으로 인해 북한에서도 소실됐을 가능성이 높다”며 “의회도서관에서 희귀본으로 보관 중인 이들 자료는 유일본으로 여겨진다”고 말했다.
문제는 이들 희귀 자료들이 60년이 넘어가면서 마모와 훼손이 진행되고 있는 점이다. 당초 지질이 그리 좋지 않은 데다 세월이 흐르면서 누렇게 변색되거나 가장자리가 부스러진 책들이 적지 않다. ‘학습재료’ 1호, ‘선동원수첩’ 등의 경우 벌써 해독하기 어려운 페이지도 눈에 띈다. 사서 리씨는 “책 자체에 대한 보존작업도 필요하지만 상태가 더 악화되기 전에 내용을 스캔해서 디지털로 보전하는 게 시급하다”고 말했다.
워싱턴=글·사진 배병우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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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15-02-16 02:26 수정 2015-02-16 09: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