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근대교육 선구자, 아펜젤러] (14) 안식년, 한국사랑의 실천

입력 2015-02-17 02:27 수정 2015-02-17 16:51
청일전쟁 중 청나라 병사가 조선군에 의해 포로로 잡힌 모습으로 아펜젤러가 촬영했다(위쪽 사진). 아펜젤러가 안식년 도중에 쓴 편지로 한국 상황에 대해 논의하는 내용이 담겨 있다. 배재학당역사박물관, 소요한 교수 제공

아펜젤러는 한국 선교 기간에 두 차례의 안식년을 가졌다. 첫 안식년은 1885∼1892년을 사역한 후 맞이했다. 이 안식년 동안 그는 태평양을 건너 캐나다 밴쿠버를 통해 미국으로 귀국했다. 두 번째 안식년은 1893∼1900년 사역 이후였다. 이번엔 인도양을 거쳐 스위스와 영국을 포함해 유럽을 방문한 후 뉴욕에 도착했다. 두 번째 안식년을 마치고 조선으로 귀국할 때는 가족의 교육 문제로 홀로 돌아와야 했다.

1885년 4월 5일 부활절, 조선 땅을 밟은 것이 엊그제 같았는데 7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 선교 사역 동안 자신보다 남을 섬기는 일에 매진했던 아펜젤러는 안식년을 가지지 않고 한국 사람들과 함께 지내려고 했다. 하지만 주변의 권고로 안식년을 받아들였다. 안식년을 맞이할 즈음 그의 체력은 한계를 드러냈다. 1885년 90.7㎏이나 하던 그의 몸무게가 63.5㎏으로 줄었다. 한국 온 지 7년 동안 연속되는 강행군으로 몸무게가 30㎏이나 감소한 것이다. 의사는 그에게 휴식할 것을 요구했고 선교 본부의 권고로 안식년을 맞았다.

선교보고와 후원 요청

미국에 도착한 아펜젤러의 여권에는 그의 외형에 대해 자세히 적혀 있다. 나이 31세, 키 181.6㎝, 외모 이마 넓음, 눈 회색, 그리스형 코, 입 중간크기, 턱 원형, 머리 갈색, 피부 깨끗함, 얼굴은 깨끗이 면도되었음. 20대의 꽃다운 시절을 한국에서 보내는 동안 어느덧 서른 살이 넘어 있었고 얼굴은 그가 한국에서 어떻게 지냈는지를 말해주고 있었다.

모국에 도착한 그는 아버지 집을 찾아갔다. 모처럼의 안식년을 맞아 회복하는 시간도 잠시였다. 곧이어 그가 태어난 고향을 방문하기 시작해 교회, 학교를 다니며 선교 보고를 했고 한국 선교를 확장시켜 나가기를 희망하였다. 안식년은 평소 한국에서 사역하면서 아쉬웠던 것을 미국 본토에 요청할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아펜젤러는 물질적 후원보다는 한국에 대한 미국 기독교인의 작은 관심과 기도를 요청했다.

특히 미국 동부 지역을 중심으로 이런 활동을 전개했는데, 펜실베이니아주의 디킨슨대, 로드아일랜드 피닉스의 교회에서 그의 오랜 친구인 워즈워드 목사를 만나 선교 보고를 했다. 하지만 일부 교회는 기대와 달리 10여년 전의 뜨거운 해외선교 열풍을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냉랭한 반응을 보였다.

선교 보고를 무색하게 한 곳도 있었다. 선교 보고와 후원 요청은 척박한 한국보다 더욱 몸과 마음을 힘들게 하였다. 당시 아펜젤러는 동양학자 그리피스를 만나려 했지만 그는 멀리 출타 중이어서 만날 수가 없었다. 아펜젤러가 그리피스를 찾았던 이유는 그가 무디의 집회에서 한국 선교 요청과 후원에 열정을 다했기 때문이다. 후원을 요청하기 위해 그리피스는 아펜젤러와 배재학당 학생의 사진을 시각 자료로 활용했다.

안식년 기간에도 한국 선교에 집중했던 아펜젤러는 선교에 필요한 지식을 연구하기도 했다. 1893년 랭커스터에 머물러 있을 때는 읽고 있는 도서목록을 작성했는데 주로 종교를 비교하는 비교종교론과 미국과 동아시아 정세와 관련된 책들이었다. 이런 도서에 관심을 가진 것은 그의 선교 신념과 맞물려 있다. 그는 선교사에 의해 한국 복음화가 주도되는 것이 아니라 한국적인 배경에서 한국인에 의해 복음화되기를 열망하였다.

안식년을 마칠 무렵 아펜젤러는 시카고를 거쳤다. 1893년 콜럼버스의 미국 신대륙 발견 400년을 기념하는 박람회가 시카고에서 개최됐는데 여기에 한국이 처음으로 참여했기 때문이다. 한국은 당시 ‘대죠션(The Kingdom of Corea)’이라는 이름으로 참여했다. 세계박람회 주최 측은 일본이 한국을 자신의 변방으로 소개하려는 의도와 달리 한국을 동북아시아의 주요한 국가로 간주하였고 한국의 문화와 문물인 농기구, 악기, 면, 비단, 식기 세트, 의복, 가구 등을 자세히 소개했다.

지난해 언론을 통해 당시 세계만국박람회에 참여한 한국 출품 대원 4명의 사진과 품목들이 공개되기도 했는데 박람회 출품을 총괄한 참의내무부사 정경원 이외에 3명의 신분을 알 수 없다고 하였다. 아펜젤러는 이들 중 한 명이 배재학당 학생이라고 언급하였고 학생을 만나기 위해 시카고 세계박람회에 들렀다고 기록을 남겼다.

안식년 후 한국의 상황

아펜젤러가 미국에서 안식년을 갖는 동안 선교의 책임은 스크랜턴 박사가 맡았다. 아펜젤러는 미국에 있으면서도 한국의 안부와 선교 상황 등을 편지로 주고받았다. 편지 내용은 배재학당의 운영에 관한 내용이 많은 부분을 차지했다. 스크랜턴은 아펜젤러가 없는 가운데서도 선교 확장에 힘을 쏟았고 그 덕분에 아펜젤러는 안식년을 무사히 보낼 수 있었다.

하지만 그가 돌아온 이후 한국 정세는 어느 때보다 불안했다. 1894년 동학운동과 청일전쟁이 발발하였다. 동학운동은 정부 관리의 탐학과 부패, 사회 혼란에 불만을 가지고 있는 최제우, 전봉준, 김개남 등이 일으켰던 농민 운동이다. 이들의 무장봉기는 정부군으로 하여금 외세를 끌어오게 하였는데 중국과 일본군의 도움을 받았다.

동학운동에 참여했던 일부는 기독교인과 외국인, 서양 선교사를 무참히 공격하거나 관련 인물을 살해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그 가운데서도 맥길 박사는 원산에서 의료선교를 전개하고 홀 박사 부부도 평양에서 동학과 중국, 일본군 구분 없이 헌신적으로 치료하였다. 동학운동이 가라앉기도 전에 중국과 일본은 한국에서 서로 주도권을 갖기 위해 전쟁을 일으키게 된다. 결국 청의 패배로 1895년 시모노세키조약이 체결되는 가운데 일본은 더욱 노골적으로 한반도 침략의 야욕을 드러내게 되었다.

소요한(명지대 객원교수·교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