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서 언급했지만 재소자와 그들 가족의 관계는 교도소 생활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가족의 관심과 사랑이 교정에 중요한 영향을 끼치기 때문이다. 교도소 시설 중엔 가족과 만나는 장소가 있다. 면회실이 잠깐의 재회를 위한 공간이라면 ‘만남의 집’은 가족과 하룻밤 지내며 못다한 정을 주고받는 곳이다. 만남의 집은 콘도식으로 지어져 가족들이 음식을 준비하고 재소자를 만난다. 그러나 모든 재소자에게 1박2일의 시간이 주어지는 것은 아니다. 모범수나 딱한 사정이 있는 경우에만 이용이 가능하다.
만남의 집은 2000년대 초반까지 각 지방교정청 산하 주요 교도소에 설치돼 있었지만 당시 홍성교도소에는 없었다. 그래서 주로 대전교도소까지 재소자들이 가야 했고, 순서를 기다리는 것도 오래 걸렸다. 그러다가 2003년 홍성교도소에도 만남의 집이 생겼다. 지방교정청 산하 만남의 집과 달리 개인 후원자들에 의해 건립됐다. 홍성교도소 만남의 집 개관은 어느 무기수 딸이 보내온 편지 한 통이 계기가 됐다.
그해 1월 중순이었다. 교도소 교무과에 예쁜 편지봉투와 편지지에 작은 글씨로 또박또박 쓰인 편지 한 통이 날아왔다. 사연은 이랬다. 소녀가 태어난 지 100일 즈음 아빠는 교도소에 무기수로 입소했다. 소녀는 홀로 남겨진 어머니와 함께 살아가고 있었다. 어머니는 언제나 소녀에게 아빠가 소녀를 많이 사랑하고 있으며 좋은 분이라고 말해줬다. 소녀는 아빠가 보고 싶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소녀는 아빠와 만나 하룻밤만이라도 보내면서 여느 집처럼 아빠와 시간을 보내고 싶다고 했다.
당시 담당은 홍성교도소 최초의 여성 교무과장인 정형숙 과장이었다. 정 과장과 나는 평소 만남의 집이 필요하다고 생각하고 있던 차였다. 재소자들이 끊어진 가족과의 사랑을 이어갈 수 있다면 무엇이든 해주고 싶었다. 그리고 한 달 안에 완공시켜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러려면 후원자가 필요했는데 무리였다. 경교대교회를 세우는 것도 5년이 걸렸는데 한 달 안에 어떻게 짓는단 말인가. 그래도 해야 했다. 주님을 의지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우선 정 과장과 교정협의회 회장이었던 서산순복음교회 백승억 목사님을 찾아갔다. 백 목사님은 우리 얘기를 듣더니 흔쾌히 돕겠다고 허락했다. 이를 시작으로 본격적으로 후원자들을 찾아나섰다. 놀랍게도 만나는 사람마다 만남의 집 건립 계획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며 돕겠다고 했다. 물론 후원이 잘 된 것은 아니었다. 만남의 집을 짓는 과정에서도 온갖 시기와 질투, 모함이 많았다. 구걸하는 거지처럼 대하는 사람, 순수한 마음을 몰라주는 비판도 있었다.
만남의 집은 2003년 5월 완공됐다. 전국에서 독지가들의 후원으로 지어진 교도소 내 첫 사례였다. 당시 청주교도소에도 모금에 의한 만남의 집 건립이 진행 중이었으나 홍성교도소보다 완공이 늦었다. 만남의 집 개관 이후엔 수많은 재소자들의 가족이 다녀갔다. 가족과 허락된 하루 생활을 통해 헤어진 아내가 돌아왔고 자녀들의 소원이 이루어졌다. 교도소로 편지를 보냈던 무기수의 딸도 아빠와 만났다.
만남의 집을 위한 후원에는 지역 교회와 성도들의 도움도 컸다. 그중 대천중앙감리교회 김요찬 감독은 끊임없는 기도와 후원으로 도왔던 분이다. 하지만 만남의 집 개관예배에는 오지 못했다. 갑작스럽게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기 때문이다. 세례식이나 위문예배 등 교도소 행사에 빠지지 않으며 ‘담안 선교’에 남다른 열정을 가진 분이었다.
정리=신상목 기자 smshin@kmib.co.kr
[역경의 열매] 김봉래 (11) 어느 무기수의 딸 “아빠와 단 하룻밤 만이라도”
입력 2015-02-16 02: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