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모 방망이들도 벌떼처럼 달려드네. 청파역졸 거동 보소, 달 같은 마패를 햇빛같이 번듯 들어 암행어사 출두야! 남문에서 출두야, 북문에서 출두야, 동문 서문 출두 소리 천지를 진동하니 6명의 이방들이 넋을 잃고 에고 죽네. 이리 비틀 저리 비틀 장관이로다. 부서지니 거문고요, 깨지니 북 장구라. 보고 있던 구경꾼들과 수령들이 물결같이 흩어지니 좌수, 별감 넋을 잃고 이방, 호방 실신하고 삼색나졸 분주하네. 공형들의 방망이질에 동서남북 다 막혔는데 어딜 도망가겠는가. 사방팔방에 박 깨지는 소리 절로 들리네.(‘춘향전’ 중 암행어사 출두 장면)
어명을 받고 몰래 다니는 암행어사(暗行御史)는 백성의 삶과 밀접했다. 끝없는 고단함을 살아야 하는 백성에게 단숨에 문제를 풀어버리는 암행어사는 희망, 그 자체였다. 고난이 짙을수록 암행어사를 바라는 마음이 커져 여러 구전설화를 낳기도 했다. 그중에도 ‘암행어사 박문수’는 압도적이다. 하지만 박문수는 어사였던 적은 있지만 ‘암행’어사였던 적이 없다. 그런데도 ‘암행어사=박문수’라는 등식이 오랜 세월 다져진 이유는 뭘까.
박문수는 1727년 영조의 명을 받아 영남에 어사로 파견됐다. 이때 탐관오리를 적발하고 엄하게 다스렸다. 환곡(춘궁기에 빌려줬다 추수 뒤 회수하던 국가 비축 곡물)을 풀어 백성에게 나눠주는가 하면 자기 호주머니를 털기도 했다.
조세 실무에 밝았던 그는 1731년 경기도와 삼남지방에 흉년이 들자 소금의 국가 전매권을 넘겨받아 구휼에 뛰어들었다. 낙동강 하구의 명지도(지금의 부산 강서구 명지동)에서 소금 생산을 진두지휘했다. 만든 소금은 품을 팔았던 이들과 기근에 시달리던 백성에게 줘 곡식과 바꾸도록 했다. 백성을 걱정하는 마음은 균역법 제정으로 이어졌다. 군역(軍役)을 대신해 한 사람당 2필씩 징수하던 군포(軍布)는 당시에 재앙과도 같았다. 온갖 폐단이 난무했다. 양반들은 군포를 내지 않는 ‘특혜’를 누렸다. 호조판서로 있던 박문수는 가구 단위로 군포를 징수하도록 하고, 그 수도 1필로 낮췄다. 양반에게도 군포를 부과하려 했지만 무산되자 영조 앞에서 ‘절반의 개혁’이라고 힐난하기도 했다.
박문수는 소수파인 소론에 소속된 관료인 데다 가난한 집안 출신이었다. 여러모로 정치적 입지가 좁을 수밖에 없었다. 대신 남다른 재능이 있었다. 현장에서 배우고, 현장에서 답을 찾는 리더십이 그것이다. 이걸 잘 활용한 그는 수많은 이들에게 영웅이 되고, 전설이 됐다.
현장 리더십은 요즘 박근혜정부가 소리 높여 외치는 구호이기도 하다. 대통령부터 총리, 장관들까지 ‘우문현답’(우리의 문제는 현장에 답이 있다)을 내걸고 앞다퉈 현장을 찾고 있다. 그런데 미심쩍다. 각본에 맞춘 현장만 찾고, 걸러낸 말만 듣는 건 아닌지. 건강보험료 부과체계 개선 백지화, 연말정산 파동 과정에서 현실을 제대로 보지 못하고 허둥대는 모습을 보면 ‘의심’은 ‘확신’이 된다.
문제 해결력이 없는 ‘무능 정부’는 재난이다. 박문수 같은 정치인, 공무원 하나 없는 ‘속 빈 정부’는 암울하다. 장기 불황, 저성장, 청년실업, 저출산, 고령화 등 온통 버거운 숙제를 떠안은 우리에게 시간은 넉넉하지 않다.
정부가 우문(愚問)을 던져도 국민은 현답(賢答)을 할 준비가 돼 있다. 그러니 ‘진짜 현장’을 찾아 귀 기울여 달라. 천지사방에 암행어사를 풀어 “암행어사 출두야!”라고 외쳐 달라. 얽히고 설킨 실타래를 하나라도 풀어야 하지 않겠나. 이게 현장의 마음이자 목소리다.
김찬희 사회부 차장 chkim@kmib.co.kr
[뉴스룸에서-김찬희] 암행어사 출두야!
입력 2015-02-16 02: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