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암 이응로(1904∼1989)는 프랑스 유학 이후 개척한 문자 추상과 인간 군상 시리즈로 한국성과 세계성을 접목시킨 작가로 평가받는다. 그가 유학 가기 전의 습작 과정과 작가로서의 가치관을 엿볼 수 있는 미공개 드로잉을 대거 만날 수 있다. 서울 종로구 가나인사아트센터에서 3월 1일까지 열리는 ‘고암 이응노 미공개 드로잉’전에서다.
스케치북에 연필 또는 수채 물감으로 그린 밑그림 형식이다. 여성 누드에서 산천과 도시의 풍경, 인물 군상, 꽃과 동물, 풍속 장면에 이르기까지 소재가 다양하기 그지없다. 그려진 시기는 대개 1940년대를 전후한 것으로, 6·25전쟁 이후의 서울 풍경까지 담겼다.
이응로는 대나무 그림의 대가 해강 김규진(1868∼1933) 문하에서 전통 한국화로 입문했다. 21세이던 1924년 조선미술전에선 대나무 그림으로 입선도 했다. 이후 전통 산수화의 관념 세계에서 현실 풍경으로 시선을 돌리고 인물과 풍경의 사생의 시기를 거쳤다. 대량으로 발굴된 스케치북은 이 시기에 그려진 것들이다. 이 때의 피나는 수련 작업은 그가 1958년 프랑스로 유학을 간 이후 비구상에서 대가로 크는데 밑거름이 됐을 것이다.
미술평론가 윤범모 가천대 교수는 “스케치북 앞뒷면까지 합치면 무려 800점이 된다”며 “작고 작가 중 현장 스케치를 이렇게 대량으로 남긴 건 그가 유일하다”고 말했다. 전시에서는 엄선된 400여점을 선보인다.
그는 눈에 비치는 모든 현장을 사생했다. 일제 강점기 화신 백화점에 진열된 인형, 고궁에서 쉬고 있는 노인들, 거리에서 전화 거는 여자, 나무 전봇대 세우는 모습까지 놓치지 않았다. 그 시절의 생생한 풍속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사료로서의 가치도 크다.
해방공간에서 창덕궁(당시 창경원)에서 소싸움을 벌인 것, 좌우이데올로기의 격전장에서 친일파가 린치를 당하는 모습 등이 눈길을 끈다. 6·25 전쟁 당시 조선호텔 뒤의 폭격 맞아 부셔진 붉은 벽돌담 등 폐허의 서울 풍경도 생생하게 담았다. 시대를 사생하겠다는 치열한 작가 정신이 읽혀지는 대목이다.
이번 전시는 가나문화재단이 20세기 초 근대미술을 다양한 장르에 걸쳐 재조명하는 ‘가나아트 컬렉션’전의 하나로 마련됐다. ‘한국근대조각전’ ‘근대한국화 4인전’ ‘외국인이 본 근대 풍물화전’ 등이 함께 열리고 있다(02-2075-4488).
손영옥 선임기자
시대를 사생한 이응노 정신을 읽는다
입력 2015-02-16 02:4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