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 소금·빛의 사명 에볼라 주삿바늘도 두렵지 않았다

입력 2015-02-14 02:10 수정 2015-02-14 10:54
에볼라에 감염됐다가 병을 극복하고 생존한 젊은 여성들이 최 집사(가운데)와 함께 했다. 최 집사는 “아직 긴급구호대 1진이 격리 중에 있고 언론과 첫 인터뷰라 조심스럽다”며 이름과 얼굴 공개를 원치 않았다. 최 집사 제공
시에라리온 현지에서 에볼라 감염 환자들을 치료하고 있는 대한민국 긴급구호대원들 모습. 외교부 제공
최 집사가 독일 샤리테 병원에서 부분 격리 되었을 때 병원 캠퍼스를 산책하다 그린 샤리테 병원 도서관 모습.
가더리치 에볼라치료센터에서 만난 엘렌 판디는 센터 일을 돕고 싶지만 들어갈 수 없어 매일 아침 센터 주변을 청소했다. 독일에서 격리 생활을 할 때 그녀를 생각하며 최 집사가 그린 그림.
‘에볼라 감염 의심 한국인 첫 의료대원, 독일 후송.’ 2015년 새해, 저 멀리 아프리카에서 날아든 소식에 대한민국은 온통 근심에 휩싸였다. 서아프리카 시에라리온에 파견돼 에볼라 바이러스 대응에 참여한 대한민국 긴급구호대(KDRT) 의료대 1진 중 한 명이 에볼라 감염 환자 채혈을 하다 손가락에 주삿바늘이 스친 것이다. 독일 병원으로 이송됐고, 에볼라 바이러스 잠복기 동안 격리치료를 받았다. 최종 ‘비감염’ 판정을 받고 지난달 20일 귀국했다.

그 의료대원을 지난 11일 서울 동대문구 시립대로 다일복지재단에서 만났다. 응급의학과 13년차 전문의로 어린 딸(12), 아들(9)을 둔 40대 중반의 엄마. 서울다일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하는 최○○ 집사다. 교회는 긴급구호대로 출발하는 최 집사를 축복하며 파송예배도 드렸다. 최일도 담임목사와 교인들의 중보기도 속에서 떠났던 길, 그는 주삿바늘에 찔렸어도 두렵지 않았다고 고백했다.


가족 응원에 힘입어 거침없이 달려간 길

최 집사는 2014년 10월 26일 언론 보도를 통해 모집 공고를 봤다. 교회에서 필리핀으로 의료봉사를 갔다 온 지 얼마 안 됐을 때였다. 딱 나흘 고민하고 30일 국립의료원 쪽에 지원서를 냈다. 11월 24일 전후로 1차 합격 메일을 받고, 최종 합격 소식을 들은 건 12월 4일. 이어 8∼10일 국내 교육을 받았다.

-가족들 반응은 어땠나. 주변에서 많이 말렸을 것 같은데.

“11월 말쯤 남편에게 가장 늦게 알렸다. 미리부터 마음고생 시키고 싶지 않았다. 11월 중순쯤 남편에게 ‘내가 무엇을 하든 나를 믿고 지지해줬으면 좋겠다. 걱정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말한 적이 있다. ‘이 사람이 어디 가는구나’라고 약간 눈치는 챘을 것 같다. 남편이 건강하게 잘 갔다 오라고 응원해줬다.”

그러나 지인들은 만류했다. 특히 최 목사는 합격 발표 전부터 최 집사를 설득했다. 최 목사는 “우리 집사님은 지난해 세월호 참사 때 바지선에 올라 의료봉사를 했던 보물 같은 분”이라며 “한 생명이라도 건지기 위해 의료인의 한 사람으로서, 소금과 빛의 사명을 다하는 교회의 한 성도로서 당당히 지원했다는 말에 오히려 설득 당했다”고 말했다. “젊은 의사가 간다면, 은퇴 의사가 간다면 담임목사로서 내 마음이 괴롭진 않았을 거다. 어린 자녀를 둔 엄마 의사가 간다니까 말리고 싶었던 거다. 하지만 갈 만한 의사들이 안 간다면 엄마 의사라도 가야 하지 않겠는가?” 그래서 최 목사는 12월 7일 최 집사의 시에라리온 파송예배를 드렸다.

최 집사를 포함해 10명의 긴급구호대 1진은 12월 13일 영국으로 출발했다. 15∼19일 런던 인근 우스터 에볼라 대응 훈련소에서 안전교육을 받고 21일 시에라리온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에볼라 퇴치’라는 공동의 목적 아래 모인 전 세계 구호대원 50여명이 탑승했다. 최 집사는 “멀리서 온 그들은 모두 피곤해보였지만 에볼라와 싸워야 하는 우리는 진한 ‘전우애’로 불탔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두렵지 않았나.

“물론 그렇지 않았다고 하면 거짓이다. 자다가 이유 없이 두려움에 휩싸여 눈을 뜬 적이 있다. 그런데 비행기 안에서 ‘…어두울 때 퍼지는 전염병과 밝을 때 닥쳐오는 재앙을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로다 천 명이 네 왼쪽에서, 만 명이 네 오른쪽에서 엎드러지나 이 재앙이 네게 가까이하지 못하리로다’(시 91:2∼7)는 말씀을 묵상하는데 두려움이 싹 사라졌다.”

미안한 일 아닌데, 왜 그렇게 미안한지…

시에라리온 수도 프리타운 인근 가더리치에 있는 에볼라치료센터(ETC)에서 환자들을 진료했다. 25일 정식 스케줄이 나와 그날부터 의료활동에 들어갔다. 그간 언론에 보도된 27일보다 이틀 빠른 셈이다. 방호복을 입고 에볼라 환자의 증상, 소변의 양, 수액량을 체크하고 혈액 검사를 위한 채혈은 수시로 했다. 10여명의 의사들이 24시간 돌아가며 근무했다.

-기억에 남는 환자가 있나.

“성탄절인 25일 방호복을 입고 처음 환자와 마주한 날이다. 12세 곱슬머리 여자아이 ‘하자’는 고열에 구토까지 겹쳐 몸을 뒤틀었다. 얼마나 괴로운지 ‘water! water!(물! 물!)’ 외에는 다른 어떤 말도 하지 못했다. 같이 있던 영국인 의사는 하자에게 I’m sorry, I’m sorry(미안해)라고만 했다. 미안한 일이 아닌데, 미안하다고 그러더라. 나도 미안했다. 내가 방호복을 너무 뒤집어써서 미안했다.”

최 집사는 하자를 만나고 일기에 이런 기록을 남겼다. “너의 고통이 어느 만큼인지 몰라 미안하다. 따뜻한 맨 손으로 너를 만질 수 없어서 미안하다. 아픈 너를 가족과 떨어뜨려 외롭게 해서 미안하다. 이런 황량한 텐트 안에 누워있게 해서 미안하다. 너를 만진 몇 겹 고무장갑마저 만질 때마다 소독해야 하는 나의 행동이 미안하다.”

사건이 나던 때는 현지시간으로 12월 29일 오후 6시쯤. 최 집사는 채혈을 위해 20대 여성 환자의 팔을 붙잡았다. “팔을 죽 늘어뜨리더라. 바늘을 찌르고 피를 뽑는 순간 그녀가 고개를 휙 돌리며 팔을 격하게 움직였다. ‘헉, 이게 뭐지?’ 오른손에 들고 있던 주삿바늘이 왼손 검지 안쪽 부위를 찔렀다. 세 개의 장갑에 구멍이 났다는 건 확실히 바늘이 통과했다는 것이다. 당황했다. 30초쯤 멍했다. 환자와 눈이 마주쳤는데, 초점 없는 그녀의 눈빛을 본 순간 소름이 끼쳤다. 그녀는 이미 의식을 잃어가고 있었다. 그리고 다음날 그 에볼라 환자는 사망했다.”


최 집사는 상처 입은 손가락에 계속 압박을 줬지만 출혈은 없었다. 5% 염소소독약에 해당 부위를 30분간 담갔다. 의료활동을 시작한 지 닷새 만에 사고가 났고, 1월 2일 결국 가더리치를 떠나 독일의 샤리테 병원으로 이송됐다. 방호복을 입고 마중 나온 의료진에 의해 바로 격리됐다. 에볼라 환자를 치료하던 그는 그렇게 에볼라 감염 의심 환자가 됐다.

“남편과 최 목사님에게만 사고 사실을 알렸다. ‘에볼라에 걸리면 어떡하지?’ 그런 두려움은 없었다.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건강하게 잘 나갈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다. 나를 사지로 보내놓고 지금껏 울며 기도하는 중보기도의 힘을 느꼈던 거다.”

최 집사는 1차 채혈 검사에서 음성 판정을 받았지만 9일 동안 완전 격리된 채 정밀검사를 받았다. 이후에는 게스트하우스로 옮겨져 8일 동안 부분격리 생활을 했다. “이때는 방호복이 아닌 평상복 차림의 의료진을 만나 차를 마시고 대화도 나눴다”고 했다.



‘사람 사랑 열매’를 배우는 시간

-격리된다는 건 어떤 느낌인가.

“9일 동안 독방에서 혼자 지낸다고 상상해보라. 그 시간 동안 나는 철저하게 자유를 억압당했다. 내 몸조차 마음대로 하지 못하는 그런 느낌. 고독, 외로움과 싸우느라 힘들었다. 시에라리온에 있는 동료나 가족, 지인들과 문자를 주고받는 게 유일한 소통이었지만 그것도 1시간 남짓이다. 23시간을 뭘 하면서 지내겠는가. 책을 읽는 것으로 시간을 보냈다.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이란 세 권짜리 책을 집중해 읽었다. 시에라리온을 돌아보며 글을 쓰고 그림도 그렸다. 그럼에도 자유가 없다는 건 고통이었다.”

최 집사가 그렇게 바라던 자유는 그러나 쉽게 오지 않았다. “자유는 내가 그리는 대로 가는 거다. 8일간 부분격리 생활을 하면서 북유럽 여행 계획을 짰다. 의학적으로 1월 19일이면 나는 완전 해제였다. 자유를 찾아 떠나는 여행을 꿈꿨는데, 어느 날 정부 관계자가 안 된다고 하더라. 1진 긴급구호대원들과 같이 귀국해 3주간 더 신변 보호를 받으라는 거다. 얼마 만에 얻게 된 자유인데, 못하겠다고 했다. 그 말을 전해 듣고 하루 반나절 동안 정말 지옥 같은 시간을 보냈다.”

-어떻게 해결했나.

“평소 교회에서 알고 지내던 선배 의사분께 자문을 구했다. 이것저것 물어보셨다. 생활은 어떠냐, 한국에 돌아오면 다른 대원들과 격리하라는 것이냐, 격리 안 하면 집에 가서 일할 수 있는 것이냐…. 질문과 답을 주고받는 동안 마음이 누그러지는 걸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마지막에 그분이 그랬다. ‘그래도 좋게 해결하는 게 낫지 않을까요?’ 침대에 누워 숨을 몰아쉬는데 갑자기 눈물이 났다. ‘자유가 그립고 지금이 너무나 힘들지만, 이렇게까지 내가 분노해야 하나. 무엇을 위해 열을 내고 있는 건가.’ 문득 십자가의 길과는 맞지 않는다는 걸 깨달았다. 회개했다. 좋은 방향으로 인도해 달라고 기도했다. 어떤 결과가 나오든 수용할 수 있는 마음을 달라고도 기도했다. 마음이 평안해졌다. 그리고 기다렸다. 물론 여행은 포기했다. 한국 가서 가족과 함께 지내라는 결정이 내려졌고, 19일 퇴원해 20일 혼자 귀국했다. 사랑하는 가족을 만났다.”

긴급구호대 1진 역시 지난달 26일 귀국해 에볼라 바이러스 잠복기인 3주 동안 자발적 격리 중이다. 15일 오전이면 그들도 모두 가족 품으로 돌아간다.

최 집사는 이번 여정을 ‘사람, 사랑, 열매’로 정의했다. 에볼라에 감염된 환자를 돕기 위해 현장에 갔지만 그곳에서 그는 더 많은 사람을 만났다. 독일 병원에서 그를 위해 애써준 의료진도 그들 중 한 명이다. 그런 관계 속에서 사랑을 경험했다. 특히 자신을 위해 중보해준 이들의 사랑을 잊을 수 없다. 그러면서 열매가 천천히 맺어졌다. 열매란 더 성숙하고 변화되는 과정을 말한다.

“남편이 함께 교회에 다니게 됐다. 아이들, 특히 딸이 엄마와의 헤어짐을 잘 참아내고 부쩍 이해심이 넓어졌다. 시에라리온에서 에볼라 환자가 줄고 있는 것도 열매다. 내 짐을 정리하면 봇짐 하나다. 의미 있는 일을 하기 위해 언제든 떠날 수 있다는 게 내 삶의 가치다. 그렇게 찾아가 사람을 만나면 사랑이 싹트고, 변화가 생기고 열매가 맺힌다. 그런 선한 영향력을 두루두루 끼치고 싶다.”

노희경 기자 hkroh@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