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교 시절, 책상 앞 잘 보이는 곳에 ‘I can do it’이라고 써 붙여 놓고는 큰 소리로 읽곤 했다. 하지만 평상시 스스로에게 주입하던 ‘나는 할 수 있다’는 글귀와 달리 기도할 때는 주님께 도와달라고 했으니 참 웃기는 고교생이었다. 시간이 지나고 현실과 타협하면서 이상은 낮아지고 꿈은 흐지부지해진다. 속으로는 내가 최고라고 되뇌어보지만 내가 최고가 아니란 사실을 누구보다 나 자신이 잘 알고 있다.
중년에 가져야 할 겸손은 좌절로 배운 겸손이 아니어야 한다.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내 한계를 인정한다면 그것은 겸손이 아니라 굴복이다. 사실 내가 할 수 있는 것들을 상상만 해도 얼마든지 마음이 뿌듯하고 행복할 수 있다. 그 순간만큼은 내가 위대한 사람처럼 느껴진다. 비록 현실 속 나는 그렇게 위대하지도, 그렇게 대단한 능력이 있지도 않지만 말이다. 다만 내가 할 수 있는 몇 가지를 상상했을 뿐인데 그 결과는 나름 흡족하다. 게다가 그 몇 가지도 대부분 나 개인의 능력이 아닌 다른 사람들의 도움의 결과였다. 따라서 내 능력으로 할 수 있는 것에 집중하는 인생은 실패와 좌절의 골짜기를 벗어날 수 없다.
겸손은 내가 가진 것, 또 내가 할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인생의 선물로 받아들이도록 해준다. 내 인생 가운데 일어난 수많은 일에 대해 감사할 수 있다면 우리의 인생은 겸손의 옷을 입을 수 있다. 오늘 나의 인생 이력을 만들기까지 배후에 수고했던 손길들을 겸손히 헤아려보면 모두가 은인이다. 누구에게나 어려운 상황에서 부족한 능력 가운데 나를 극복하고 뭔가 해낼 수 있도록 만들어준 크고 작은 사건들이 있을 것이다. 겸손한 마음으로 지나온 내 삶을 뒤돌아본다면 그 속에서 축복의 순간들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교만은 세상을 힘겨운 고난의 상자로 만들지만, 겸손은 세상을 선물상자로 만들어주기 때문이다.
중년에 겸손의 옷을 입어야 하는 중요한 이유 중 하나도 겸손이 미래를 여는 열쇠가 될 수 있다는 점에서다. 나이 들어 지식도, 경험도 많아지지만 누구에게나 배우려는 겸손한 태도로 다가가면 노년이 외롭지 않다. 겸손은 사람을 평안하게 만들어준다. 내가 상대를 인정하고 존중한다고 해서 그것이 나를 초라한 사람으로 만들지 않는다. 상대방의 능력과 가치를 인정할 줄 아는 탁월한 능력과 인격을 갖고 있을 때 우리는 비로소 겸손해질 수 있다. 따라서 겸손이란 실패한 인생을 산 사람들의 전유물이 아니다. 내가 성공한 경험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다른 사람을 존중할 줄 아는 것이 진정한 겸손이다. 그런 점에서 겸손한 사람과 성공적인 인생은 결코 반비례하지 않는다.
마음의 상처를 치유 받고 극복한 경험으로 다른 사람의 아픈 마음을 공감하며 위로해줄 수 있다면 겸손한 사람이 될 수 있다. 사실 스스로 겸손한 사람이라고 착각하는 사람은 많아도 주위 사람들이 겸손한 사람으로 인정할 수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그래서 교만한 사람을 찾긴 쉽지만 겸손한 사람은 보기 힘든 것이다. 함께 있기만 해도 마음이 따뜻해지고, 무언가 새로운 일을 시작하도록 힘을 북돋워주는 겸손한 사람이 되기 위해 오늘도 힘차게 살아보자. 겸손을 인생의 좌우명 중 하나로 삼아보자.
예수님의 제자인 베드로는 자기 확신으로 가득 찬 사람이었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백 점짜리 고백을 했지만, 정작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 앞에서는 형편없는 겁쟁이였다. 자기감정과 자기확신을 따라 행동하다가 결국 실의에 빠진 채 갈릴리 바닷가로 되돌아갔다. 밤새도록 빈 그물을 붙들고 씨름하던 베드로와 제자들에게 주님은 찾아가셨고, 그들은 땅끝까지 증인의 역할을 감당하는 사도로 다시 세움 받았다. 그리고 사도행전의 현장에서 삼천 명, 오천 명이 회개하는 복음 설교자가 되었다.
중년의 시기는 내 확신과 내 경험을 하나님의 은혜 앞에 내려놓는 시간이다. 여기에서 자기부인의 삶을 사는 진정한 겸손이 출발한다. ‘내가 오늘의 내가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고전 15:10)라는 사도 바울처럼 말이다. 내가 이룬 모든 것의 주관자 되신 하나님을 인정하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겸손이다. 만일 자신의 인생을 보면서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왔음을 고백하지 못한다면 참된 겸손과는 거리가 먼 인생이라 할 수 있다.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이다(잠 16:18). 하나님의 은혜 없이는 실패할 수밖에 없는 인생임을 날마다 인정하고 고백하며 살아가자. 나를 낮추고 주님을 높이며 내 주변 사람들에게 감사하자. 오늘 내가 살아온 하루를, 그리고 다가올 나의 미래를 인생의 선물로 가득 채우는 겸손한 사람이 되자.
이의수(사랑의교회 사랑패밀리센터·남성사역연구소장)
[이의수 목사의 남자 리뉴얼] 겸손한 남자들의 인생 행복
입력 2015-02-14 02: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