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의헌의 성서 청진기] 불로소득

입력 2015-02-14 02:52

얼마 전 뉴스에서 불법 칠게 잡이가 서해안 갯벌 생태계를 위협하고 있다는 기사를 보았다. 검색을 해보니 지난해 12월에도 관련 기사가 있었다. 여전히 문제가 계속되고 있다는 말이다. 더한 문제는 단속으로 불법 조업자가 사라진 자리에 여전히 조업 도구가 남아 있어 칠게들이 희생된다는 것이다. 자료화면을 보니 U자형 PVC관을 갯벌 바닥에 두고 이를 통에 연결하여 지나가는 칠게들이 모두 빠져 통에 모이게 되어 있었다. 마치 깊은 수로가 이어져 동물들이 빠지면 다시 나올 수 없는 구조와 비슷했다. 조업자의 수고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이쯤 되면 가히 불로소득이라 할 만하다. 게다가 규모가 너무 커 칠게의 씨를 말릴 수도 있을 정도의 강력한 조업이 이루어진다는 점에서 경각심을 가져야 한다.

편을 들어주고 싶지는 않지만 불법 조업자들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면 아주 편안한 발상이었을 것이다. 한 번 설치하면 수고하지 않고 수익을 거둬들일 수 있으니 말이다. 사실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원리로 수익을 올리고 싶어 한다. 돈이 돈을 번다는 말이 있다. 처음에 어떤 체계를 세우고 나면 그 체계가 돈을 벌어준다고 하자. 그러면 이후로는 많은 수고를 들이지 않고 큰 이득을 볼 수 있으니 얼마나 만족스러운 일인가?

땀 흘린 만큼 소득을 얻는 경우는 이러한 요소가 적다. 정직한 노력의 대가를 받는다는 점에서 매우 가치 있지만 앞서 언급한 경우에 비해 상대적으로 노동이 많이 필요하기 때문에 노력 대비 결과에서 상대적인 박탈감을 느낄 수도 있다.

데살로니가전서 3장10·12절, 4장11절을 읽어보면 묵묵히 자기 일에 힘쓰는 것의 중요성을 인식하게 된다. 특히 3장의 말씀들은 일하는 것과 먹는 것을 연결시키고 있는데 이는 지금 시대의 관점에서 보면 일과 소득의 관계라고 볼 수 있으며 투자와 이익의 관계도 포함된다. 그런데 이런 말씀을 기준으로 지낸다고 한다면 앞서 말한 상대적 박탈감을 똑같이 갖게 될 수 있다.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가 불로소득을 전적으로 거부할 수는 없으며 그것을 모두 비윤리적이라고 생각할 필요 또한 없다. 우리는 이자 수익을 얻을 수 있고 흘린 땀 이상으로 체계 자체가 이득을 주는 예를 누릴 수도 있다. 문제는 어느 정도까지냐는 것인데 그 기준이 명료하지 않다. 불법 다단계 판매의 문제를 지적하는 것은 이러한 애매한 기준을 좀 더 명확하게 하는 하나의 좋은 예이다. 불로소득은 확실히 욕심의 본성을 건드린다. 불로소득의 부분이 커질수록 우리는 더 욕심을 내어 적법성을 넘어서거나 파괴성을 나타낼 수 있다.

문명과 계급사회는 불로소득의 유혹을 높인다. 돈을 사랑하는 것이 일만 악의 뿌리(디모데전서 6장10절)라는 내용도 생각해보면 불로소득의 측면이 가장 큰 요인이다. 불로소득을 위해서는 체계와 규모가 중요하다. 규모가 클수록 불로소득에 유리해진다. 이러한 특성을 극대화하려는 대표적인 노력이 바벨탑이라고 할 수 있다(창세기 11장). 그들은 자기들의 이름을 떨치고 사방에 흩어지지 않도록 하자고 했다. 어릴 적에는 바벨탑이 너무 높아서 하나님에게 닿을까봐 하나님이 언어를 흩으셨다고 배웠는데, 어린 마음에 진짜 그래서인 줄 알았다. 선하게 이름을 드높이며 그 영향력을 확산하려고 했다면 굳이 하나님이 언어의 혼란으로 벌하시지는 않으셨을 것이다.

노력 대비 결과가 기대 이상으로 좋을 때 “하나님이 도우셨다”라고만 생각하지 말자. 그것이 불로소득이기 때문에 우리를 욕심으로 이끌 수 있는데, 이를 하나님의 도움으로 말하기 시작하면 자신의 욕심을 신앙으로 합리화할 위험이 생기는 것이다.

최의헌<연세로뎀정신과의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