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김봉래 (9) 5년 인고의 기도끝에 전국 첫 교도소교회 설립

입력 2015-02-12 02:47
김봉래 목사가 1997년 3월 28일 홍성교도소 내 경교대교회 입당예배에서 소감을 발표하고 있다.

“아니, 교도소 안에 어떻게 교회가 세워질 수 있습니까? 당신 사기치고 있는 거 아니오?”

홍성교도소 안에 교회를 짓자는 얘기가 나왔을 때 교화위원인 한 장로님의 말이었다. 교도소 사정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그였기에 의심은 당연했다. 지금도 그렇지만 그 전까지 교도소 안에 교회를 설립하는 것은 꿈도 꿀 수 없는 일이었다.

그 일은 1993년 따뜻했던 어느 늦은 봄에 시작됐다. 경비교도대 대원들의 생일과 진급자들의 축하예배가 있었다. 마침 여러 모로 신경을 써준 홍성장로교회 여전도회 김정순 권사님과 나는 예배를 마친 후에 차를 마시며 담화할 시간을 갖게 됐다. 그런데 얘기 도중 권사님은 뜬금없이 나에게 한 가지 제안을 하셨다.

“전도사님, 이곳에 예배당을 세우면 참 좋겠네요.”

“네? 교도소 안에 예배당을 짓자고요?”

나는 그것이 감당하기엔 턱도 없는 일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뭔가 끌려가듯 했다. 나는 생각할 틈도 없이 불쑥 이렇게 말했다.

“교도소 안의 예배당, 참 좋은 생각이네요. 하나님께서 역사하실 줄 믿고 한번 해봅시다!”

도대체 어디서 이런 믿음이 생겼는지 모르겠다. 시작은 미약하나 그 끝은 창대하리라는 문구처럼, 홍성교도소 교회(경교대교회) 예배당 건축은 그렇게 시작됐다. 그리고 그때부터 5년의 세월이 흘렀다. 인고의 세월이었다. 이것은 하나님과의 무언의 약속이었다. 그 시절, 나는 기필코 해내고야 말겠다는 확신이 마음속에 용솟음치는 것을 느꼈다.

교도소 교회. 상상만 해도 은혜와 감동의 물결이 마음을 벅차게 했다. 군인들을 선교하고 재소자들을 교화하는 것, 이보다 더 뜻 깊은 일은 없었다. 나는 마음을 단단히 먹고 세세한 계획을 세웠다. 경교대 중대장과 상의하면서 교도소 소장에게 보고했다.

당시 중대장 의견은 허술했던 경교대 내무반과 생활공간 없는 대원들을 위해 면회실과 목욕 시설을 신축하면서 예배당도 포함시키는 것이었다. 마침 이듬해인 94년 7월, 법무부 장관으로부터 복지관 신축 승인을 받았다. 교회를 세울 준비는 끝난 셈이었다. 그런데 이번엔 공사비가 문제였다. 복지관 건립 금액은 총 1억원이었다. 한두 푼도 아니고 어마어마한 돈을 마련하는 것은 무리가 따르는 것이 당연했다.

나는 당시 홍성장로교회 김성 전도사와 긴밀하게 의논하면서 후원 대책을 세웠다. 하지만 후원은 고사하고 왜 경교대 대원을 위한 교회를 건축하느냐는 반문만 돌아왔다. 경교대 예배당은 대원과 교도소 선교를 위한 전초기지였다. 내 확신은 더 분명해졌다. 나와 아내는 전세금 일체와 결혼 패물, 아이들 돌반지까지 건축헌금으로 내놓았다. 그렇게 5년이 흘러 모인 후원금은 550만원이 전부였다.

그러던 차에 일이 풀리기 시작했다. 내무반 건물을 신축하게 되면서 편의 시설도 포함됐다. 예배당은 바로 앞에 따로 세우기로 결정이 난 것이다. 노천예배를 드리던 바로 그곳이었다. 총공사비도 5000만원으로 재조정됐다. ‘바울과 베베선교회’에서도 건축을 돕겠다고 연락이 왔다.

후원금도 답지했다. 당시 MBC 미술국장이며 순복음교회 안수집사였던 홍순찬 집사가 모금을 도왔다. 그렇게 해서 모금이 진행됐고 500만원을 남겨놓고 있었다. 이런 가운데 동일교역의 박원호 사장이 1000만원을 헌금했다. 박 사장은 가수 싸이(본명 박재상)의 부친이기도 하다. 교회 건축은 96년 11월 공사를 시작했고, 이듬해 3월 28일 완공됐다. 전국 최초의 교도소 내 교회가 세워진 것이다. 우리는 아무 것도 없었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 같았다(고후 6:9∼10).

정리=신상목 기자 smshi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