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6월 원세훈 전 국가정보원장이 대선 개입 혐의로 재판에 넘겨지자 한 판사는 기자에게 “왜 이런 사건을 법원이 떠맡아야 하는지 모르겠다”고 했다. 최근 1심에서 무죄가 선고된 ‘NLL 대화록 삭제 사건’ 때도 마찬가지 반응이었다. 요지는 “정부가 정치적으로 처리할 문제를 사법기관에 떠넘긴다”는 것이다.
‘정윤회씨 국정개입 의혹’은 단적인 예다. 박근혜정부는 사건이 불거지자 발 빠르게 검찰에 고소했다. 검찰 내부에서 “이런 수사는 정말 하고 싶지 않다”는 말마저 돌았다. 청와대 내부 갈등을 관리해야 할 비서실장은 아무 책임을 지지 않았다.
정부가 온당히 져야 할 의무와 책임을 소위 ‘엘리트 조직’인 사법부나 검찰에 미루는 게 아닌가 하는 의심마저 든다. 세월호 참사 당시 박근혜 대통령은 “아직도 못 잡는 건 말이 안 된다”며 유병언씨 조속 검거를 촉구했다. 수사를 지휘한 인천지검장은 결국 검거에 실패해 옷을 벗었다. 참사의 근본 책임이 유씨에게 있는지는 제쳐두더라도, 과연 검찰 간부가 책임질 일이었는지 의문이다.
정부가 정치적 갈등 해소를 방기하고 법적 판단에만 의존하면 불필요한 국론 분열을 낳을 수도 있다. 해산된 통합진보당의 지지율은 2%밖에 되지 않았다. 충분히 국민의 투표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를 정부는 굳이 법 심판대에 올렸다. 헌법재판소는 2014년 연내 선고를 강행했고, 각종 오류를 수정하지 못한 채 나온 결정문은 불필요한 논란을 불렀다.
‘국정원 사건’에서 심리전단 직원들이 대선 후보자 비방글을 올린 사실은 재판 전에 대부분 특정돼 있었다. 하지만 정부는 “법원 판단을 보겠다”는 말만 되풀이했다. 2심 재판부가 공직선거법을 유죄로 인정해 발생한 파장은 정부가 책임을 사법부에 미루면서 자초한 것이다. 의혹이 제기됐을 때 사과하고 적극적인 국정원 개혁으로 풀었어야 할 일을 2년 넘게 끌어왔다.
정부는 지금 ‘대법원 판단을 보겠다’는 생각일지 모른다. 하지만 사법기관 뒤로 숨어 책임을 미루는 일은 이제 끝내야 한다. 혹시 정부가 연말정산 파동이나 각종 인사 파문에 대해서도 할 수만 있다면 ‘사법부 판단’을 받아보고 싶어 하는 건 아닌지 의구심마저 생긴다.
나성원 사회부 기자
[현장기자-나성원] 법 만능주의 정부가 자초한 ‘선거법 유죄’
입력 2015-02-11 04:36 수정 2015-02-11 18: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