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색한 인문교양서에 얼굴 묻고 까르륵 깔깔, 웃은 적이 있다. 조지 오웰의 ‘위건부두로 가는 길’을 보다가 한번 그랬다. 1930년대 영국 북부 탄광도시의 비참을 그린 르포르타주에 폭소라니. 절대 웃음 나는 풍경이 아닌데 말이다.
“나는 그렇게 분한 마음을 품고서 감자 껍질을 벗길 수 있는 사람은 처음 보았다.” 이 대목 때문이었다. 앙심 품고 감자 껍질을 벗기는 남자라니. 유시민은 진중권의 ‘네 무덤에 침을 뱉으마’를 읽다가 침대에서 굴러 떨어질 뻔했다고 했다. 오웰 시절의 영국처럼 박정희의 대한민국 역시 웃다 구를 만큼 신나는 시대는 아니었다. 웃음 안 나서 더 웃겼다고 하면 모르겠지만.
오웰이 말한 감자 깎는 사람은 하숙집 주인 베이커씨다. “낮에는 가득 찬 요강단지를 엄지손가락이 잠기도록 들고” 다니고 아침엔 “더러운 물에 담긴 감자를 슬로모션으로” 깎으며 “쓰디쓴 체액처럼 속에서 부글부글하는” 적개심을 품은 인간이다.
상상해보라. 퀴퀴한 하숙집 바닥에 앉아 구정물에 손을 담근 채 감자를 깎고 또 깎아도 가난은 “바퀴벌레처럼 빙글빙글” 도로 그 자리인 인생. 식민지라는 초대형 시장을 잃은 대영제국이 뒷골목에 토해놓은 베이커씨들. 그들 위로 피어오르던 적개심.
70여년 전 저 멀리 섬나라의 어느 퇴락한 부둣가 하숙집 주인을 떠올린 이유는 증세 논란에 치민 울화 때문이었다. 연말정산 사태가 법인세율 인상(실은 MB정부 이전 수준으로 되돌리자는 것이지만)으로 번지자마자 대기업에선 이런 반응이 나왔다.
“법인세 올리면 기업들이 임금을 깎거나 구조조정을 할 텐데. 물건값 올리거나. 그러면 월급쟁이들이 제일 손해 봐요.” 이 말을 기획재정부 방식으로 바꾸면 ‘법인세율을 올려도 세수가 늘지 않을 수 있다’가 되는 거다. 점잖게 말했지만 사실 협박이다.
법인세율 낮춰준 일은 기억도 희미하다. 세금 깎아줘야 기업이 투자를 늘린다고 했을 때 그런가보다, 넘어간 탓이다. 이듬해 정부는 ‘세율 낮추니 법인세가 더 많이 걷혔다’고 자화자찬했다. 금융위기에 떨어진 세수가 회복된 거였지만 어쨌든 늘어난 건 늘어난 거였다. 그렇게 또 몇년이 흘렀다. 시간이라면 충분했다는 뜻이다. 그러니까 정책 실패가 확인된 지금, 법인세 인하가 투자와 일자리로 이어지지 않은 게 명백해진 이 시점에, 법인세율 원상회복을 말하는 건 자연스러운 귀결이다.
더구나 돈은 안 걷히고 지출은 커져 다들 고통스러운 시절 아닌가. 개인은 이미 지갑을 열었다. 담뱃세 올렸고 연말정산 개편으로 소득세도 더 낼 예정이다. 담배 다음은 술일 테고 주민세·자동차세 인상도 대기 중이다. 아비를 아비라 부르든 말든 증세는 시작됐다.
개인이 저항을 안 한 건 아니다. 화내고 항의도 했다. 하지만 그뿐이다. 개인에게는 기업처럼 줄이겠다, 깎겠다, 협박할 수단이 없다. 세금 더 걷는다고 생활비를 얼마나 줄일 수 있겠나. 얼마간 줄어든 소비는 아이러니하게 영세 자영업자 등부터 후려친다. 이래저래 우리끼리 제살 깎아먹기다. 무엇보다 불안한 시대 복지를 늘리려면 세금을 더 내야 한다는 데 반박할 말이 없다.
사정이 이런데 대기업은 언제나 그렇듯, 혼자 제일 힘들다고 아우성이다. 그러니 어쩌겠는가. 복지는 필요하고 큰 기업은 못 내놓는다고 버티니 우리가 뭘 할 수 있겠나.
그저 더러운 물에 손을 담근 채 감자나 깎는 수밖에. 분한 마음을 쓸개즙처럼 부글대며 누구 하나 걸리기만 해라, 앙심이나 품는 수밖에. 어느 재벌 3세를 자근자근 밟아줬듯 온라인에 댓글이나 올리는 수밖에. “지하에 갇힌 더러운 바퀴벌레처럼” 불평불만이나 늘어놓는 수밖에.
이영미 종합편집부 차장 ymlee@kmib.co.kr
[뉴스룸에서-이영미] 앙심 품고 감자 깎기
입력 2015-02-09 02: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