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드 이슈] 치프라스(그리스 신임 총리)의 한 수, 신의 한 수?

입력 2015-02-10 02:15
급진좌파연합(시리자)의 알렉시스 치프라스 대표가 신임 총리에 오르면서 그리스의 ‘빚 청산’을 둘러싼 유럽의 분위기가 시시각각 달라지고 있다. 절박한 빚쟁이 치프라스 총리와 야니스 바루파키스 그리스 재무장관의 ‘노타이 로드쇼’에 이탈리아 등 일부 이웃 국가들은 유럽연합(EU), 유럽중앙은행(ECB), 국제통화기금(IMF)으로 이뤄진 이른바 ‘트로이카’ 채권단과의 구제금융 재협상을 지지한다고 밝히기도 했다. 하지만 “채무 탕감은 안 된다”는 게 여전히 유로존(유로화 사용 19개국)의 중론이고, 그리스는 ‘채무 탕감은 아니지만 채무 탕감 효과가 있는’ 절충안을 제시했다.

◇경제성장률 연동채권, 당장 숨통 트여줄 수 있겠지만…=“채무를 상환하겠다는 약속을 지키라”는 유럽 국가들의 강경한 태도에 치프라스 총리는 “더 이상 채무 탕감을 요구하지 않겠다”면서 대신 기존의 채권을 1인당 GDP와 연계한 채권이나 영구채권으로 바꾸는 방안을 내놓았다.

그리스가 한 발 물러선 듯 보이지만 채무자 입장에서는 훨씬 숨통 트이는 똑똑한 조건이다. GDP 연계채권은 경제가 성장하는 속도에 비례해서 빚을 갚겠다는 뜻이다. 채권자에게 빌린 돈을 갚되 자금 사정이 괜찮을 땐 많이 갚고, 돈이 없을 땐 좀 천천히 갚게 해 달라는 제안이다. 영구채권도 마찬가지다. 갚아야 하는 시점을 정하지 않고 돈을 빌리겠다는 의미다. 금융권에서는 그리스가 유로존을 탈퇴하거나 파산을 선언하는 쪽보다 이같이 채무 상환 조건을 완화하는 쪽으로 일이 진행되지 않겠느냐는 분석이 나온다.

일각에선 그리스의 제안이 사실상의 헤어컷을 의미한다고 풀이한다. 빚 자체가 줄어드는 것은 아니지만 그리스의 제안이 받아들여진다면 수중에 돈이 한 푼도 없을 때 1000원을 갚아야 했던 상황이 금고에 돈이 가득할 때 1000원을 갚아도 되는 상황처럼 바뀔 것이라는 해석이다. 또는 내년까지 갚아야 했던 돈을 2년 후까지 갚아도 된다고 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얘기다. 각각의 경우 채무자가 느끼는 부담의 크기는 하늘과 땅 차이다. 문제는 과연 채권단이나 채권국들이 이를 받아들이겠느냐는 것이다.

LG경제연구원 류상윤 책임연구원은 “채권자 입장에서는 어떻게 될지 모르는 채무자의 빚을 무작정 떠안고 있어야 되는 상황”이라면서 “최대 채권국인 독일에서 앞으로도 이를 받아들이긴 쉽지 않을 것”이라고 예상했다.

◇“그렉시트·디폴트 가능성 지금으로선 높지 않다”=물론 그리스가 유동성 위기에 빠질 가능성이 없다고는 그 누구도 장담할 수 없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그리스가 최근 세수 감소로 한 달 이내에 국가 재정이 바닥날 위기에 처했다”고 보도하기도 했다. WSJ에 따르면 그리스 세수는 지난해 12월 기준으로 전월 대비 7% 감소한 15억 유로(약 1조8700억원)로 집계됐다.

그럼에도 그리스가 유로존을 탈퇴하는 그렉시트(Grexit)나 디폴트(채무불이행)에 빠지는 상황까지 이르기는 쉽지 않다고 전문가들은 분석한다. 유로존이 크게 흔들리는 상황을 채권국도 원치 않을 것이라는 예상이다. 그리스가 이 점을 알고 있기 때문에 ECB가 “그리스 국채를 담보로 인정하지 않겠다”고 발표했을 때도 오히려 “ECB는 그리스가 아닌 유로그룹(유로존 재무장관 협의체)에 사태 해결을 압박하려고 한 것”이라는 배짱을 보였다는 해석이 많다. 새로 정권을 잡은 치프라스 총리가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고려해 그리스를 바닥까지 끌어내리는 그렉시트 상황으로는 몰고 가지 않을 것이라는 시각이다.

EU 집행위가 트로이카를 철수시키고 그리스가 개별 채권국과 협상하도록 할 수도 있다는 뜻도 내비쳤지만, 실제로 그럴게 될 가능성은 크지 않다는 시각이 우세하다. 열쇠를 쥐고 있는 독일이 요구하는 대로 그리스 경제 전반에 구조개혁과 긴축을 강조하면서 어떻게든 타협안을 도출해낼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유로그룹이 12일(현지시간) 회의에서 그리스 구제금융 방안에 대해 어느 정도 진전된 결과를 도출해낼지 주목된다.

삼성증권 김지은 선임연구원은 “최악의 경우 그렉시트가 발생해서 글로벌 증시가 폭락하고 금융시장 전체가 망가질 때는 국내뿐만 아니라 세계적으로 영향이 있겠지만 시장에서 아직까지 그런 ‘가장 극단적인 시나리오’에 대해 생각하진 않고 있다”면서 “예상보다 빠른 속도로 상황이 흘러가고 있기 때문에 우려했던 것보다는 빨리 윤곽이 드러날 수 있을 것으로 본다”고 전망했다.

그러나 그렉시트를 강하게 주장하는 목소리도 있다. 앨런 그린스펀 전 미국연방준비제도 의장은 “그리스와 유로존이 헤어지는 것이 최선”이라며 “그리스의 유로존 이탈이 불가피하다”고 말했다.

◇허약한 기초체력과 ‘복지 퍼주기’가 세계적 불신의 발단=그리스는 애초부터 독일 영국 등 다른 EU 국가들보다는 상대적으로 기초체력이 약한 상황에서 유로존에 가입했다.

2010년 구제금융을 요청한 뒤 2012년 집권한 신민당이 긴축재정을 실시하면서 개혁을 밀어붙였지만 그리스 경제는 좀처럼 회복되지 못했다. 지난해 말 현재 그리스의 실업률은 26%에 달한다. 지난해까지 2400억 유로(약 300조원)의 구제금융 지원을 받았지만 국가부채 비율은 2009년 130%에서 지난해 174%로 뛰었다. 지난해 0.8%의 재정흑자로 돌아섰음에도 EU 국가들이 여전히 그리스를 불신하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류 연구원은 “2008년 리먼 브러더스 사태 이후 그리스는 본격적으로 경기가 악화되기 시작했다”면서 “그리스에 대한 위험도가 높아지다 보니 채권 이자율이 뛰고, 이자를 갚기 위해 국채를 발행하면서 부채가 더 늘어나는 악순환이 계속돼 왔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그리스 경제가 불안한 원인 중 하나로 제조업이 아닌 해운·관광업 등 서비스업 바탕의 경제 구조를 지목한다. 그리고 그리스는 유로존 가입과 동시에 채권을 무리하게 발행해 빚더미에 올라앉을 위험을 키우고 있었다. 투자보다는 복지 분야 지출이 계속된 데다 부패가 만연했기 때문에 여러 나라에서 끌어온 돈은 고스란히 부채로 남았다. 당장의 위기를 모면한다고 해도 경제구조 개혁 없이는 그리스가 여전히 ‘유럽 경제의 뇌관’으로 남아 있을 것이라는 분석이다.

임세정 기자 fish813@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