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개신교 선교사들은 한국 선교를 위한 노력으로 교육선교, 의료선교와 함께 문서선교에 노력을 기울였다. 문서를 통한 선교는 시공간 제약 없이 한번에 복음을 전파하는 효율적인 수단이었다. 아펜젤러는 한국의 복음을 위해 문서선교에 선구적인 기여를 하였다.
아펜젤러의 문서사업은 중국 선교사 올링거를 초청하면서 시작하였다. 올링거는 1870년부터 중국 푸저우(福州)에서 16년 동안 선교하였던 동북아 선교의 베테랑이다. 올링거 선교사는 1887년 12월부터 배재학당의 교사이자 삼문출판사(三文出版社) 사장으로 한국의 문서선교를 이끌었다.
삼문출판사는 당시 서울 정동에 있었기 때문에 ‘정동예수교출판소’라고 불리기도 하였고, 미국 감리교 선교사들의 약자인 ‘MEM(Methodist Episcopal Mission)’을 중국어 ‘美以美(메이이메이)’로 읽고 표기한 데서 ‘미이미활판소(美以美活版所)’로 불리기도 하였다. 또 ‘한미화출판소(韓美華出版所)’라고 불리기도 하였다. 한국어, 영어, 중국어를 출판한다고 해서 불려졌다.
이렇게 삼문출판사가 다양한 명칭을 갖고 있었다는 것은 복음 선교와 더불어 근대 한국 출판문화에 기여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올링거 선교사는 당시 상하이와 일본에서 인쇄기 및 활자 주조기를 도입하여 한글, 영어, 한자를 인쇄하였는데 삼문출판사는 당시 정부의 인쇄시설인 박문국(博文局), 민간 인쇄시설인 ‘광인사인쇄소(廣印社印刷公所)’와 더불어 출판과 문서선교를 주도한 유일한 기독교 출판사였다.
삼문출판사의 역할
아펜젤러는 삼문출판사를 단순히 출판 업무에만 국한시키지 않았다. 배재학당 학생들 중 학비가 부족해 학업이 힘든 학생들을 위해 출판사에서 일을 하면서 스스로 학비를 벌 수 있는 자주정신을 도모하였다.
대표적으로 한글학자 주시경도 배재학당 학생 시절, 삼문출판사에서 일하며 학비를 벌었다. 주시경은 이를 계기로 학비 문제를 해결했을 뿐 아니라 한글 활자 조판 등 출판 업무를 보면서 한글 학자로 성장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 주시경은 출판 업무에 참여해 한글이 세계 어느 나라 문자보다 뛰어나고 과학적이며 편리한 문자라는 것을 깨우쳐 1897년 4월, 독립신문에 2회에 걸쳐 한글의 우수성에 관한 글을 기고하였다.
출세를 목표로 배재학당에 들어왔던 학생들은 출판 업무에 참가하면서 기독교 진리를 깨우치는 등 자연스럽게 복음을 받아들이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이들은 책을 만드는 과정을 통해 활자나 내용 등을 직접 편집하면서 스스로 기독교 진리를 읽고 믿고 고백하는 과정을 거쳐 기독교인이 되었다.
당시 삼문출판사가 출판했던 대표적 잡지 및 도서를 내용적 기준으로 나누면 크게 3가지 정도로 구분할 수 있다. 첫째는 기독교 신문, 잡지 등 정기간행물이고 둘째는 일반서적, 교과서 출판이다. 셋째는 성경과 찬송가, 교리서 등이다. 삼문출판사가 간행하였던 대표적인 출판물은 1889년 발행된 ‘교회’가 있다. 이 잡지는 나중에 ‘죠션크리스도인회보’로 바뀌게 된다.
이외에 ‘The korean Repository’, ‘협성회보’, ‘대한매일신보’, ‘천로역정’, ‘성교촬요’, 장로교 선교사 언더우드의 ‘제세론’, ‘그리스도신문’ 등이 있으며 초기의 ‘독립신문’, ‘The Korea Mission Field’도 삼문출판사를 통해 인쇄되었다. 삼문출판사는 교파의 구별 없이 복음 전파와 한국의 근대화라는 목표 아래 감리교, 장로교 문서 모두를 출판하였다.
이 같은 초교파적 협력은 현대 한국 기독교인들이 흔히 하는 질문인 “누가 한국 기독교 전파에 큰 역할을 했는가”를 역사 속에 찾는 것이 무색하게 할 정도로 장로교와 감리교는 출판 문서의 내용, 편집을 복음이라는 큰 목적 아래 면밀하게 협동해 나갔다. 대표적인 예로 삼문출판사의 사역에 부응하기 위해 대한기독교서회의 전신인 조선성교서회(朝鮮聖敎書會)가 창립됐는데 여기엔 미 북장로회 선교사(언더우드, 게일, 마펫, 기포드)와 미 감리회 선교사(아펜젤러, 스크랜턴, 올링거, 존스, 헐버트, 벙커, 맥길), 독립 선교부 펜윅이 모여 창립했다. 조선성교서회는 특정 교파를 강조하지 않았던 것이 특징이다. 오직 복음의 확장과 쉬운 접근을 목표로 “조선어로 기독교 서적과 전도지, 정기 간행의 잡지를 발행하여 전국에 보급하여 조직한다”는 것을 강조하였다.
삼문출판사와 교파 연합
아펜젤러의 ‘죠션크리스도인회보’와 언더우드의 ‘그리스도신문’을 살펴보면 두 문서는 서사문학 자료를 함께 공유, 활용하고 이를 논설로 이끌었던 흔적을 살펴볼 수 있다. 기본적이며 공통적인 기독교 교리에 대한 해석, 장로교와 감리교의 교회 소식, 동서 문화, 역사, 문물, 사상을 소개하여 민중의 안목을 넓히고 폭넓은 지식 함양에 기여하는 등 계몽적인 역할을 수행하였다.
기존 학계는 표면상으로 이 둘의 문서를 보고 감리교와 장로교 양 교단의 독립적인 문서로서 경쟁상대로 인식하였으나 아펜젤러와 언더우드는 상호 경쟁이 아닌 상호 우호를 지향하며 다양한 내용의 문서를 편집, 발간하였던 것이다. 이들 문서에는 “미이미교회(감리교회)만이 위함이 아니오, 다른 교회나 교회 사람들을 다 위하는 문서”라며 실제 지향하는 목적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1902년 안타까운 인사 사고로 해상에서 유명을 달리하였던 아펜젤러의 순직으로 감리교 문서 사업은 주춤하기도 했으나 언더우드는 동역자 아펜젤러의 뜻을 이어 ‘그리스도신문’으로 통합하게 된다. 이처럼 문서 사업의 통합과 연합이 수월하게 이루어졌던 배경에는 아펜젤러와 언더우드가 경쟁이 아닌 협력 정신이 작용했던 것이다.
소요한 명지대 객원교수·교목
[한국 근대교육 선구자, 아펜젤러] (13) 근현대 출판의 산실, 삼문출판사
입력 2015-02-10 02: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