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만해협의 조그만 섬 진먼(金門)에서 하룻밤을 보냈다. 1984년 처음 방문한 이후 31년 만이다. 그때는 타이베이에서 비행기로 왔고 이번엔 대만을 마주보는 남중국 최대 무역항 샤먼(厦門)에서 배를 타고 왔다. 굳이 샤먼-진먼-타이베이 경로를 택한 것은 이 지역이 중국과 대만의 대립-화해-상생의 변화과정을 그대로 보여주는 역사적 루트이기 때문이다. 대립과 반목의 굴레를 벗지 못하는 답답한 남북관계와 너무도 다른 이들의 변화를 피부로 느끼고 싶었다.
진먼은 우리의 백령도, 연평도와 같은 곳이다. 아니 그보다 더 중국대륙에 근접해 있으면서 마오쩌둥(毛澤東)이 그토록 염원하던 ‘대만 해방’을 온몸으로 저지한 최전선의 군사적 보루다. 당연히 대만 병력의 대부분이 이곳에 집결해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군사적 긴장을 전혀 느낄 수 없다. 최근엔 1958년 중국군이 비 오듯 퍼부었던 포탄의 잔해로 ‘평화의 종’을 만들기도 했다. 그저 부러울 뿐이다.
무엇이 이들의 적개심과 분노를 해소시켰을까. 어떻게 타도, 해방의 대상에서 공생 공영의 동반자가 되었을까. 그 배경과 복잡한 과정을 모두 설명할 수는 없지만 간략하게 몇 가지를 짚어 본다.
긴장 느낄 수 없는 대만의 최전선
첫째, 지도자의 사명감과 결단이다. 부친인 장제스(蔣介石)에 이어 종신 총통직을 승계한 장징궈(蔣經國)는 병세가 극도로 악화된 집권 말기에 대륙과의 교류를 트기 위해 고심했다. 특히 1949년 장제스를 따라 대만으로 패퇴한 수십만 대륙 출신 군인들의 친척방문(探親)을 추진했다. 당시 장징궈는 공산당 정부와의 접촉·담판·타협을 결사반대하는 국민당 원로들을 일일이 설득했다. 결국 1987년 11월 노병들의 역사적인 고향 방문이 시작되었고 두 달이 지난 그 다음해 1월 장징궈는 사망했다. 죽음을 직감한 지도자의 인도주의적 결단이었다.
둘째, 체제·이념적 장벽을 우회하는 유연한 정책이다. 1971년 유엔은 대만이 중국의 불가분한 일부분이라는 ‘하나의 중국’ 원칙을 결의했다. 하지만 대만은 이를 거부하며 자신들이 엄연한 주권국임을 강조한다. 대만의 정치적 지위를 둘러싼 대립이 지금도 해소될 기미가 없다. 하지만 이것이 양안의 경제교류와 인적 왕래에 전혀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철저한 정경분리를 통해 윈-윈의 영역을 부단히 확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만약 중국과 대만이 체제·이념에 계속 집착했다면 지금의 양안관계는 근본적으로 불가능하다.
남북관계 개선하려면 부단히 노력해야
셋째, 교육·문화·언론 등 중국과 거의 모든 분야에서의 교류 확대를 통해 주민들 사이에 정서적 공감이 확산됐다. 장기간 극한의 체제·이념적 대결 구도 하에서 살아온 주민 간의 상호신뢰는 결코 쉽게 이루어지지 않는다. 장기적 안목의 부단한 교류와 협력이 이들의 뿌리 깊은 불신을 서서히 완화시켜 나갈 수 있었다.
지금의 한반도는 어떠한가. 한때 중국과 대만인들은 남북 정상회담을 부러워했다. 그러나 이젠 부러워하는 것은 고사하고 남북관계를 긍정적으로 인식하는 사람들조차 찾기 어렵다.
무엇이 문제인가. 양안관계와 남북관계의 형성 배경과 대내외적 조건의 차이는 엄연히 존재한다. 그러나 우리가 비이성적인 상대의 무도함을 구실로 대결구도를 너무 당연시하고 있진 않은지, 국제사회의 차가운 시선에 기죽어 무력감에 빠져있진 않은지, 실패가 예정된 자기 희망적 정책에 지나치게 몰입하고 있진 않은지 냉정하게 곱씹어 볼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대만해협의 평화가 귀한 노력의 결과이듯 한반도의 봄도 저절로 오지는 않는다.
문흥호 한양대 국제학대학원 원장
[한반도포커스-문흥호] 진먼에서 그려보는 한반도의 봄
입력 2015-02-09 02: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