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史草 폐기 사건’ 정쟁으로 시작 무죄 판결로 끝나다

입력 2015-02-07 02:33

‘사초(史草) 폐기 사건’으로 불리며 정국을 뒤흔들었던 ‘북방한계선(NLL) 대화록’ 삭제 공판에서 노무현정부 인사들이 모두 무죄를 선고받았다. 노무현정부가 남북정상회담 대화록을 고의로 숨기려 했다는 검찰 주장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NLL 포기 발언 의혹’으로 촉발된 이번 사건에서 새누리당은 대화록 삭제 논란으로 불필요한 정쟁을 불러일으켰고, 검찰은 이에 동조했다는 비판을 피하기 어렵게 됐다.

서울중앙지법 형사30부(부장판사 이동근)는 6일 대통령기록물관리법 위반 등의 혐의로 기소된 백종천(72) 전 청와대 외교안보실장과 조명균(58) 전 청와대 안보정책비서관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삭제된 대화록 초본은 대통령의 최종 결재가 이뤄지지 않았던 것이라 대통령기록물로 볼 수 없다고 판단했다. 대화록 완성본이 정상회담 녹음파일을 기반으로 생산된 상황에서 초본은 당연히 폐기돼야 했다는 해석이다.

◇법원 “대화록 초본 폐기 타당”=쟁점은 초본 삭제가 정당했는지 여부였다. 검찰은 “노무현정부가 NLL과 관련된 민감한 발언을 숨기려고 초본을 삭제했다”는 주장을 폈다. 하지만 재판부는 ‘초본 삭제는 관례였고 당연히 삭제돼야 했다’는 노무현정부 측 주장을 받아들였다. 초본에 대한 수정·재검토를 노 전 대통령이 지시한 점을 고려할 때 초본은 ‘공식 결재’ 문건이 아니라는 것이다. 초본은 대통령기록물이 아니므로 대통령기록물법 위반도 무죄라는 결론이다. 미완성 초본이 완성본과 혼동될 수 있는 점을 고려할 때 폐기도 타당하다고 봤다.

다만 재판부는 초본과 완성본 내용에 유의미한 차이가 있는지, 노 전 대통령에게 삭제해야 할 ‘특별한 의도’가 있었는지 등에 대해선 별도로 언급하지 않았다. 유·무죄 판단과 직접 관련이 없는 데다 자칫 정치적 논쟁을 낳을 수 있다는 점을 고려한 것으로 풀이된다.

검찰과 변호인은 해당 쟁점에 대해 격렬한 법정공방을 벌여왔다. 검찰은 ‘임기 동안 NLL 문제는 치유된다’는 노 전 대통령의 회담 발언, 김정일 전 국방위원장에게 존칭을 사용한 정황 등을 고려할 때 삭제 의도가 충분히 인정된다고 주장했다. 반면 변호인은 “NLL 포기 발언 자체가 없었기 때문에 일부러 삭제할 이유가 전혀 없었다”고 맞섰다.

◇노무현재단 “정치검찰·여당 심판해야”=‘NLL 파문’은 대선을 앞둔 2012년 10월 불거졌다. 새누리당 정문헌 의원이 “노 전 대통령이 2007년 남북정상회담에서 NLL 포기 발언을 했다”고 밝히면서다. 국가정보원은 원세훈 전 원장이 ‘대선개입 의혹’으로 기소된 지 10일 만인 2013년 6월 24일 회의록 전문을 공개했다. 논란이 계속되자 국회는 대통령기록관에 보관된 원본을 열람키로 했다.

하지만 원본은 찾을 수 없었다. 새누리당은 ‘사초가 폐기됐을 수 있다’며 백 전 실장 등을 고발했다. 검찰은 대통령기록관에서 대화록을 찾지 못했지만 노 전 대통령이 퇴임 전 복사해 간 ‘봉하 이지원’에서 초본이 삭제된 흔적과 완성본을 발견했다. 검찰은 이를 ‘사초 삭제’로 봤다. 다만 해당 초본 및 완성본에도 직접적인 NLL 포기 발언은 없었다.

6일 재판을 방청한 노무현정부 측 인사들은 선고 직후 박수를 치며 환영했다. 백 전 실장은 법원을 나서며 “사필귀정”이라고 소회를 밝혔다. 노무현재단은 “검찰의 표적수사에 사법부가 엄중 경고했다. 이제 심판은 정치검찰과 새누리당이 받아야 한다”고 성명을 냈다. 새정치연합 대표 선거에 나선 문재인 의원은 “처음부터 말이 안 되는 기소였다”고 비판했다.

◇대통령기록물 첫 법리 판단…‘정윤회 문건’ 영향은?=이번 판결은 대통령기록물관리법 위반에 대해 사법부가 내린 사실상 첫 판단이다. 재판부는 각종 법령을 종합해 대통령기록물의 기준을 상세하게 규정했다. 대통령기록물을 문서·카드·전자문서 등 형태의 기록정보 자료라고 봤다. 개인이 단순 생산한 것만으로는 부족하고 대통령이나 보좌기관 등의 ‘결재’가 끝나야 한다고 해석했다. ‘결재’에는 공문서로 등록하겠다는 결재권자의 의사가 있어야 한다. 내용도 대통령의 직무수행과 관련돼야 한다.

대통령기록물법 위반 여부가 쟁점인 ‘정윤회씨 국정개입 의혹’ 사건에도 ‘NLL 판결’이 가늠자 역할을 할 것으로 보인다. 청와대 유출 문건들이 대통령 직무수행과 관련성이 있는지, 결재권자의 ‘결재’를 마친 문건으로 볼 수 있는지 등이 쟁점이 될 전망이다.

나성원 기자 naa@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