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석우 그림산책] 일상에 숨겨진 신비한 아름다움

입력 2015-02-07 02:11
조안석의 '사랑', 2008
사람마다 나름 최상의 가치를 추구하며 살고자 한다. 인생에서 최상의 가치는 무엇일까. 플라톤 같은 이는 정의, 용기, 창조, 지혜 등을 꼽은 것으로 기억된다. 그러나 이들을 넘어선 사랑이야말로 인생 최고의 가치이자 인류 최대의 화두가 아닐까. 삶이란 나그네 같은 방황이자 혼돈이기도 하지만 왕왕 성경구절 한마디가 내 삶을 환히 밝혀주는 깨달음을 준다.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시기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고전 13:4∼7)

나는 지금까지 사랑에 대한 정의 중 이 가르침을 뛰어넘는 말을 만난 적이 없다. 그리고 사람들 사이에서 실현된 최상의 사랑은 어머니에게서가 아닌가 싶다. 이청준의 단편소설 ‘눈길’을 읽으면서 나는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 그것은 어머니의 자녀에 대한 사랑과 그리움의 극치였다.

그보다 더 큰 사랑은 창조주가 행한 사랑이다. 그의 사랑은 우리의 존재함이다. 일상과 자연 속에 들어있는 모든 것이 신비이자 사랑이며 아름다움이 아닌가. 빛이 없었다면, 색채가 없이 하얀색 하나로, 아니면 검정색으로만 세상이 이뤄졌다면 얼마나 삭막할까? 고난에서 연단을 주신 것도 좌절 중에 소망을 갖게 한 것도 채울 수 없는 고독과 그리움을 느끼게 함도 우리의 성숙됨을 위해서다.

숲 속의 나뭇잎 부딪히는 소리, 흩날리는 눈발, 맑게 들려오는 어린아이들의 웃음소리, 보고 걷고 읽고 숨쉼이 경이롭지 않은가. 3일만 눈을 뜰 수 있다면 하고 간절히 원했던 헬렌 켈러를 생각해보자.

작가 조안석은 이런 일상과 감사, 사랑을 이 작품 속에 담고자 한 것 같다. 밝은 햇살 아래 하얀 모자와 투피스를 입은 엄마, 그리고 눈망울 초롱초롱한 딸아이를 그 엄마는 깊고 자애로운 눈으로 쳐다본다. 왜 이 그림에서 나는 렘브란트의 ‘돌아온 탕자’(1668∼69)와 ‘유대인 신부’(1668)를 떠올렸을까. 등장인물은 다르지만 사랑과 자애로움, 빛의 입체감, 그리고 고요한 미감을 느껴서인가.

20세기 현대미술은 전통적인 화법을 깨부수면서 시작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특히 르네상스 이후 지켜온 기본율이라 할 원근법을 무시하였다. 형태나 사물에 예속되는 것을 피하고자 화가들은 형태를 닮게 그리는 것을 멀리 하고자 회화 자체의 독자성을 얻으려 했다. 그리는 대상보다 작가 자신의 사의(그리는 의도)를 훨씬 중시해서 관람자는 작가의 설명을 듣기 전에는 작품을 이해하기 어려운 경우도 생기게 되었다. 이로 인해 현대미술은 난해해지고 소통이 어렵게 된 것도 사실이다. 그 점에서 조안석의 그림은 현대적이라기보다 정통을 이어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작가도 보이는 사물들 속에 보이지 않는 오묘함이 있음에 놀라고 이를 그리려고 한 것 같다. 그래서 그에게 중요한 것은 미술 양식이 아니라 사물의 본질에 도달하고자 하는 작가적 진실이다. 그가 인물과 풍경을 그리는 이유도 그들에서 오는 영감과 생명력을 드러내고자 해서이다. 빛을 각별히 중요하게 여기는 그는 그 체험을 이렇게 밝히고 있다.

“대학 1학년 때 자연을 관찰하다가 흰 벽에 비친 빛을 보다가 흰색으로만 보이던 벽이 오색찬란한 색으로 빛나는 것을 발견하고 가슴이 벅차오르던 기억… 자연은 놀라운 체계적인 지성미로 가득 찬 세계….”

이러한 감흥은 하나님에 대한 경외에 깊이 뿌리박고 있다 하겠다. 좋은 그림을 그린다는 것은 창조세계의 언어를 드러내는 일이기도 하다.

이석우 (겸재정선미술관장, 경희대 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