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굴] 크리스천들이여 교회 밖으로 나서라

입력 2015-02-07 02:55
우리시대 최고의 분단문학 작가 김원일은 '조기 통일론'에 대해 고개를 흔들었다. 그는 "통일은 어느 날 갑자기 오는 것이 아니다"면서 "큰 형님 같은 남한이 통 큰 마음으로 먼저 손을 내밀어 북한을 일으켜 세우는 전략이 절실하다"고 밝혔다. 국민일보DB
김원일이 그린 어린시절 자화상.
소설가 김원일(왼쪽)과 그의 작품으로 박사학위 논문을 쓴 정학진 목사가 지난 2일 서울 중구 장충단로 경동교회에서 분단문학에 대해 얘기를 나눈 뒤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강민석 선임기자
김원일(73)은 ‘분단문학’ 작가다. 장편소설 ‘노을’을 통해 빨갱이 자식의 은폐된 자의식, 그리고 분단과 전쟁의 아픔을 한국 문단에 처음으로 제기한 소설가다. 그의 이름 앞에는 ‘탁월한’이라는 찬사가 붙든지 ‘대표적’이라는 수사가 따라다닌다. 그러나 1990년대 이후의 그의 후기 작품들은 분단문학에서 상당히 비껴간 것을 발견할 수 있다.

그는 왜, 무엇을 위해 쓰는가? 지난 2일 서울 중구 장충단로 경동교회에서 김원일을 만났다. 그는 최근까지 54편의 단편과 15편의 중편, 그리고 장편 16종 33권을 출간했다. 이를 주제별로 나눠보면 분단관련 소설과 기독교 관련 소설, 그리고 장애인과 관련된 부분들과 실존주의와 연관된 소설 등으로 분석할 수 있다.

그는 ‘쓰고 싶은 이야기’를 쓰는 작가가 아니라 ‘써야만 하는 이야기’를 썼다. ‘김원일 소설에 나타난 기독교 사상 연구’로 지난해 한양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정학진(53) 경기도 포천 일동감리교회 목사는 “일종의 의무감 같은 것인데, 이것을 더 깊게 밀고가면 채무감이라고까지 말할 수 있다”면서 “더는 견딜 수 없는 생의 충일로 자신의 가슴을 쪼개는 석류처럼 그 또한 소설을 통해 자신을 쏟아낸다”고 밝혔다.

김원일은 소년기에 경남 진영에서 경험한 한국전쟁을 어린아이의 눈으로 기술했다. 비슷한 시기에 태어난 많은 작가들이 어린 아이의 순진한 눈으로 전쟁의 참상과 질박한 고난을 그려냈지만 김원일처럼 객관적이고 보편적인 시각으로 기술한 작가는 흔치 않다. 정 목사는 “민족 분단의 비극과 모순의 문제를 그만큼 집요하게 다룬 작가는 없을 것”이라면서 “김원일 선생님은 44편의 작품을 통해 한국문학사에 있어 ‘분단문학’이라는 창의적인 거대 담론을 형성한 작가”라고 밝혔다.

김원일 소설을 두 개의 기둥으로 세워보면 ‘가족’과 ‘종교’이다. 가족사의 대부분은 ‘집 나간 아버지’, ‘아버지를 대신해 가장이 되어버린 어머니’, ‘가장의 역할을 강요받는 장자의 이야기’ 등이다.

작품 중에는 유독 아버지에 대한 ‘속죄의식’으로 쓴 작품이 많다. 그의 아버지는 아들에게 언제나 ‘꺼리거나 두려워 피하는 기휘(忌諱)’의 대상이었다. 신기하고 신비스러운 도깨비 같은 존재였다. 갑자기 왔다가 어느새 사라지는 그의 아버지는 공산주의자로 동무들에게 자랑도, 발설해서도 안 되는 ‘무섭고 신비한 존재’이다.

그의 글쓰기는 아버지와의 화해를 위한 작업이다. 어머니는 가장이 부재한 상황에서 그 가장의 십자가를 떠안으라고 장남인 그를 모멸스럽게 대했다. 그 어머니에 대한 적개심과 증오감이 극에 달했지만 크리스천이자 평생 꼿꼿하게 살아온 그는 차마 어머니를 미워할 수 없었다. 단 소설 속 인물을 어머니를 대신해 분풀이할 대상으로 설정한다. 이 여성들은 주로 부정적인 이미지를 지니고 있다.

그러나 김원일의 소설에는 가난하고 배우지 못해서 ‘자기방어 능력이 없는’ 나약한 사람들을 돕는 해결사들이 등장한다. 아버지의 부재로 어머니가 ‘대리가장’이 되고, 기능을 상실한 어머니의 자리를 대신할 인물로 등장하는 누이들이다.

또한 김원일의 소설에는 여러 가지 공동체가 등장한다. 부조리한 현실 극복 차원에서 그가 실제로 젊었을 때부터 꿈꾸었던 유토피아적 공동체가 많이 나온다. 대부분 기독교적 이상사회인데 이런 생각이 그의 작품 속에 녹아 있다.

그에게 있어서 기독교란 어떤 것일까. 기독교에 대한 그의 시각은 따뜻하고 건강하다. 무조건 비판하지 않고, 맹목적으로 경도되지도 않는다.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는 균형감각을 유지한다. 그의 기독교는 ‘근본주의’나 ‘신앙의 원리주의’를 넘어선다. 그의 작품 안에서 타 종교들은 서로 부딪치지 않고 서로 평화롭게 공존한다.

초등학교 시절부터 그림 그리기를 아주 좋아했다는 김원일은 가난 때문에 고등학교 2학년 때 화가의 꿈을 접고 작가가 되기로 결심했다고 말했다. 그는 어쨌든 25세에 소설을 써 문단에 발을 들여놓았다. 문학에 뜻을 둔 10대 후반부터 햇수로 따지자면 60년 가까이 한 우물을 팠다.

얼굴에 깊게 파인 주름과 새하얀 머리칼은 세월의 흔적을 대변했지만 카리스마 넘치는 날카로운 눈빛과 칼칼한 목소리는 인터뷰하는 두 시간 동안 조금도 흐트러지지 않았다.

-어린시절 어머니의 엄한 훈육에 진력이 나셨다면서요. ‘마당 깊은 집’(1988)에 나오는 얘기가 실화를 바탕으로 쓰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숯포대 회초리(싸리나무)로 온몸에 핏줄이 서도록 맞았지요. 아비 없는 가정에서 번듯한 장남을 키우려 했던 어머니의 몸부림이었지만 어린 나는 그 속마음을 알 리 없었고, 그저 포악스러운 어머니가 원망스럽기만 했어요. 여자라면 치마라도 보기 싫었으니까요. 그래서 내 작품 중엔 연애소설은 한 편도 없습니다.(웃음)

-어머니와는 화해하셨나요.

“1980년 65세로 돌아가셨어요. 어머니는 장남인 저를 아버지 대신 가장으로 만들려고 포악스럽게 대한 것이지요. 어머니가 별세한 뒤부터 어머니 마음을 더욱 이해하게 됐고 이후 작품에서는 여성에 대한 폭력성과 야만성이 많이 누그러진 것은 사실입니다.”

-많은 독자들이 김원일이 크리스천이라는 것을 모르는 것 같은데요. 언제부터 교회에 나가셨나요.

"67년 현대문학에 장편 '어둠의 축제'가 당선됐는데, 그 때 당선소감으로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하리라'는 성경말씀을 인용한 기억이 납니다. 이어령 전 문화부 장관이 경동교회에서 간증을 하러 왔는데 나를 보더니 김 선생이 크리스천인줄은 몰랐다며 깜짝 놀라더군요. 서울 사당동에 있는 교회를 다니다가 70년대 후반부터 경동교회에 나갔습니다. 교회에 나간 지 한 1년 반 정도 됐을 때, 강원용 목사님 말씀에 매료돼 등록했지요. 하지만 예배가 끝나기 무섭게 옆문으로 빠져나왔습니다. 성격이 원래 사교적이지 못하거든요. 그러다가 어느 날 강 목사님께서 옆문으로 새는 나를 한번 보고 싶다고 해서 정식으로 인사를 드렸지만 자주 뵙지는 못했습니다. 내년이 강 목사님이 태어나신 지 100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나보고 추모 글을 하나 써달라고 하는데 참 고민입니다."(웃음)

-'늘 푸른 소나무'에서 '석송농장'과 같은 공동체가 많이 나오는데요.

"젊은 시절 공동체생활이야말로 이상향이었지요. 농촌 건설의 첩경이라 생각했고, 인생을 걸만한 가치가 있는 일이라고 보았습니다. 지금도 농촌이나 도시 가릴 것 없이 새 시대에 맞는 공동체운동이 필요한 때입니다."

-연애소설 한번 써보시죠.

"연애는 무슨…. 나는 세상에 여자가 없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많이 했거든요. 지금도 별로 관심이 없다니까요. 열혈 '전도사' 마누라 빼고 말입니다. 내 처는 지금도 하루 종일 기독교 TV 틀어놓고 리모콘을 독점하고 있어요. 내년이 칠순인데 앉으면 기도, 서면 전도, 누우면 회개하는 극성 기독교인이죠. 그거에 비하면 난…"(웃음)

-지금 우리 사회는 갈등과 분노가 폭발하는 '분노하는 사회'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탤런트 같은 목회자는 많지만 순수한 종교적 열정으로 빈자의 등불이 되는 큰 목회자가 흔치 않아요. 교인들도 내 교회 안 보다, 교회 밖으로 나가야해요. 사랑이 먼저, 나부터 낮추고 겸허한 자세로 자신보다 못한 사람들을 돌보는 일에 앞장서야죠. 세상에 대한 고민도 없고, 사회 현실과 동떨어진 생활을 하는 크리스천들이 너무 많습니다. 그렇다면 타 종교와 다를 바가 있나요."

-그동안 북한에 몇 번 다녀오셨다고 들었습니다.

"2002년 이산가족방문단 지원요원 자격으로 방문했을 때 김일성 주석 생가 등 갈 수 있는 곳만 봤지요. 정작 내가 보고 싶은 데는 갈수도 없고요. 창 밖으로 살짝 내다본 고층 아파트 외벽은 페인트 색깔이 바랬고 6층까지인가 사람들이 물을 지고 올라가는 모습이 보이더군요. 화장실 물은 어떻게 내리는지 참 궁금했어요. 아버지는 76년에 병으로 돌아가셨다는 사실을 확인했습니다. 계간지 '본질과 현상' 봄 호엔 당시 닷새 동안 방북했던 이야기를 정리한 '아버지의 나라'라는 작품이 게재될 겁니다."

-올 해가 광복과 분단 70주년인데요. 통일에 대한 전망을 좀 해주시죠.

"통일 대박이란 말들을 많이 하는데 사실 저쪽은 눈도 깜짝하지 않는데 여기서만 통일이다 뭐다 난리를 피우는 꼴이 아닌지요. 통일은 갑자기 온다고 하는데, 독일 통일과는 차원이 달라요. 북한은 동독과는 달리 체제가 견고해요. 쉽게 무너지지 않을 겁니다. 저쪽이 살기 힘드니까, 대범하게 큰 형님 입장으로 먼저 용서하고 양보하며 손을 내밀고 원조해줘야 합니다. 통일 전망은 그 후에나 할 수 있는 거죠."

-남과 북이 공동으로 추진해볼만한 것이 없을까요.

"많지요. 한국교회가 서신왕래 사업을 시작할 수 있고, 김일성 주석이 존경한 손정도 목사 기념사업을 함께 벌이는 것도 좋지요. 현대어로 번역한 북한 성경도 그런대로 괜찮던데 남북 교회가 공동번역 사업을 해보는 것도 아이디어가 아닐까요."

-선생님 작품 중에 영화로 제작된 작품은 없는지요.

"내 소설이 재미가 없나 봐요. 마당 깊은 집 등 드라마로 방영된 작품은 2개 있는데 영화로 제작된 것은 한 편도 없어요. '전갈' 등 몇 작품은 영화로 만들어도 좋을 텐데 말입니다."

윤중식 기자 yunjs@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