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완구 국무총리 후보자는 지난달 26일 새누리당 원내대표 시절 카운터파트였던 새정치민주연합 우윤근 원내대표로부터 책 한 권을 선물받았습니다. 새누리당 정두언 의원이 정계 입문 직전인 2001년 썼던 ‘최고의 총리, 최악의 총리’라는 행정평론집입니다. 정 의원은 이명박정부 탄생의 주역이었으나 정권 출범 이후에는 쇄신파로 활동하며 쓴소리를 아끼지 않았습니다. 그가 행정고시 24회에 합격한 뒤 공직생활 중 15년을 총리실에서 보낸 ‘총리 전문가’라는 사실을 아는 이는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정 의원은 총리실에서 근무하며 18명의 총리를 지켜봤다고 합니다.
지금 이 후보자의 총리 지명으로 ‘일인지하 만인지상(一人之下 萬人之上)’으로 표현되는 총리에 대한 관심이 높습니다. 정 의원의 책을 읽어 보았습니다. “역대 총리들은 얼굴마담, 방탄총리, 의전총리로 전락해 독자적인 영역을 인정받지 못했다.” “대통령을 대신해 정치적·정책적 책임을 추궁당하고, 용도 가치가 떨어지면 폐기 처분되는 소모품에 불과한 적이 많았다.” “총리라는 자리 자체가 정부의 효율성을 크게 떨어뜨리는 중요한 이유 중의 하나였다.” 지금 정치 상황에 당장 대입해도 크게 무리가 없어 보입니다. 우 원내대표는 왜 이 책을 선물했을까요?
허울뿐인 총리
총리는 관직으로는 올라갈 곳이 없는 높은 자리입니다. 조선시대로 따지면 재상입니다. 그러나 정 의원 책에 등장한 일부 총리의 뒷모습은 모양새 사납습니다. “청와대를 향해 집무실 배치를 바꿨다” “퇴임 때까지 하루도 거르지 않고 대통령에게 문안전화를 했다” “명절 선물을 청와대 부속실 직원에게까지 챙겨 보냈다” “대통령과 대화 자료를 정리하면서 글자 크기까지 신경 썼다” 등등 도저히 내각을 통할하는 ‘넘버2’의 모습으로는 보이지 않습니다. 국회 의원회관에서 지난 4일 만난 정 의원은 이런 부류의 총리들을 ‘최악의 총리’라고 평가했습니다.
정 의원은 이렇게 설명합니다.
“아주 능력 있고 인품이 훌륭하고를 떠나서 헌법과 법률에 정해진 권한을 제대로 행사하기만 한다면 최고의 총리가 될 수 있습니다. 그동안 그런 인물이 없었습니다. 권한을 근사하게라도 행사하면 이를 최고의 총리라고 칭하고 싶어서 책을 썼습니다.”
정 의원이 말한 권한이란 헌법에 명시된 내각 통할권, 장관 임명 제청권, 해임 건의권을 뜻합니다. 요즘 자주 등장하는 ‘책임총리’가 바로 이 같은 권한을 행사하는 총리를 말합니다. 법에 명시된 권한조차 제대로 행사 못했던 게 우리나라 총리의 현실이라는 뜻입니다.
일각에서는 대한민국의 경우 대통령에게 권한이 집중돼 있어 사실상 ‘책임총리’ 실현이 불가능하다는 시각도 있습니다. 그러나 정 의원은 “노무현 전 대통령이 이해찬 전 총리에게 힘을 실어 줬듯 대통령 하기 나름”이라고 단언합니다.
“대통령은 직접 일을 하는 자리가 아닙니다. 일은 각 부 장관이 하는 것이고 대통령은 장관들이 일을 잘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역할입니다.”
이완구 후보자, 구원투수 될까
정 의원은 이 후보자에 대해서는 기대감을 드러냈습니다.
“이 후보자는 본인 스스로 대통령에게 직언도 하고 헌법과 법률이 정한 권한도 행사하겠다고 했습니다. 그대로만 하면 최고의 총리가 될 수 있습니다. 그동안의 공직 인생을 보면 장악력도 있습니다. 총리가 되면 내각이 긴장할 것입니다.”
그는 박근혜정부에서 필요한 총리의 역할에 대해 “대통령과 다른 의견을 많이 듣고, 다른 의견이 옳다면 이를 경청한 뒤 국정운영에 반영시키도록 하는 역할을 하는 총리”라고 지적했습니다.
정 의원은 “인사 청문회가 능력보다 개인의 흠 위주로 진행돼 아쉬운 부분이 많습니다. 위험한 말이지만 우리가 가장 훌륭하다고 칭송하는 황희 정승도 조선왕조실록에 보면 흠이 많았습니다. 지금 같은 청문회라면 황희 정승도 인준을 통과할 수 없습니다”라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정 의원의 책은 출간되자마자 공직사회에서 센세이션을 일으켰습니다. 조직을 배반한 공무원이라는 비난까지 들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 책은 14년이 지난 지금까지 총리 개각 때마다 회자됩니다. 그만큼 우리나라에서 총리의 문제점이 개선되지 않았음을 방증합니다.
“역대 총리들을 보면 임명 당시에는 모두 스포트라이트를 받았지만 물러날 때는 다 초라하게 물러났다. 대통령 대변인 노릇하다가, 한 번 싸우면 또 금방 물러나고. 이 후보자를 많이 아끼고 좋아해서 그런 총리는 되지 말라는 것을 역설적으로 말해주고 싶었다.” 이 후보자에게 책을 선물한 우 원내대표의 말입니다.글=전웅빈 기자, 사진=김태형 선임기자 imung@kmib.co.kr
[슬로 뉴스] 얼굴마담·방탄·의전… 그런 총리 되지 말라
입력 2015-02-06 02:49 수정 2015-02-06 18: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