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 내가 여기 있사오니 나를 보내소서 나의 맘 나의 몸 주께 드리오니 주 받으옵소서.” 신앙이 있는 그리스도인들이라면 거개가 비장한 마음으로 불렀을 찬양이다. 이 찬양을 부르고 난 후 예배당을 빠져 나가면서 우리의 고민이 시작된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 때문에 고백한 찬양이지만 그처럼 살지 못하는 이율배반적인 삶의 궤적 때문이다. 이런 연약함을 고백하는 이들이 모인 곳이 바로 교회가 아닐까?
나는 노숙과 야영을 하고, 바게트로 허기를 달래면서 유럽의 종교 개혁지를 자전거로 돌았다. 그러면서 이런 고생담을 어디 나누기가 차마 부끄러워질 만큼 질곡의 삶을 살다 간 많은 믿음의 위인들을 만났다. 그중에서도 성경의 사람이라고 불리는 한 남자의 삶은 그리스도의 향기를 남기며 내게 깊은 묵상을 던져 주었다. 세속의 영광이 아닌 기꺼이 모진 십자가의 길을 가겠느냐고, 네 믿음에 세상 어디에서도 심지어 ‘칼끝’에서도 부끄럽지 않게 고백할 수 있는 용기가 있느냐는 내면의 물음이 마치 청문회를 당하는 느낌이었다. 2011년 11월 벨기에의 겨울, 그 추위 속에서도 뜨겁게 차오르는 도전을 던진 이는 바로 윌리엄 틴데일이다.
독일의 작은 마을 비텐베르크에서 마르틴 루터가 95개조 반박문을 붙여 종교개혁의 깃대를 높이 세웠을 당시였다. 이웃 영국에는 절대 권력의 부패한 교회에 맞서 온전한 하나님의 말씀을 대중에게 설파할 꿈을 가진 또 한 명의 젊은이가 있었다. 헬라어에 능통했던 그는 하나님의 말씀이 어려운 라틴어로만 전수되어 특권층의 소유가 되는 걸 원하지 않았다. 진리는 대중에게 올바르게 전해져야 한다고 굳게 믿었다.
에클레시아(Ecclesia)를 ‘교회’가 아닌 ‘회중’으로 번역한 데서 시대적 사명을 가진 틴데일의 의도를 읽어볼 수 있다. 교회란 제도와 건물에 얽매이는 것이 아닌 믿음을 지닌 사람들의 모임이라는 뜻으로 해석해 하나님의 말씀을 종교 장사를 위한 전유물이 되지 않도록 만들었다. 또 당시 ‘자선’으로 번역된 아가페(Agape)를 ‘사랑’으로 번역했다. 성직자에게 ‘고해’하던 것 역시 신 앞에 ‘회개’하는 것으로 펜의 촉은 날카롭게, 읽는 마음은 거룩하게 했다. 문맥을 끊임없이 연구하며 하나님의 뜻이 무엇일까를 깊게 묵상했다. 그렇게 성경 번역과 인쇄, 보급에 매진했다.
영국에서부터 시작된 고독하고 위험천만한 작업은 독일을 거쳐 벨기에에 이르도록 계속 진행되었다. 시련이 왜 없었겠는가. 영국 왕이었던 헨리 8세부터 국민의 피를 뽑아 사리사욕을 채워대던 성직자들까지 그를 이단이라 거칠게 몰아세우며 성경 번역과 보급 활동을 철저하게 반대했다. 주교 턴스텔은 성경을 불태우도록 지시했고, 호시탐탐 틴데일을 잡아가려는 권력의 끄나풀들이 주변을 샅샅이 뒤지는 바람에 신변의 위협을 느낀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때마다 극적인 하나님의 도우심이 있었다.
“하나님께서 저의 생명을 연장시켜 주신다면 쟁기를 가는 소년이 당신들보다 더 성경을 알 수 있도록 할 것입니다”라고 담대하게 고백한 그는 안타깝게도 가까운 친구이자 밀고자였던 헨리 필립에 의해 잡히고 말았다. 벨기에의 빌보르드에서 화형을 당하면서 그가 외친 기도는 바로 영국 왕의 회심이었다. 교황의 뜻이 하나님의 뜻보다 위에 있었던 시대, 온전한 복음의 정수를 전하기 힘썼던 틴데일의 인생은 시대의 권력, 즉 ‘갑질’ 앞에 두려워 떠는 작금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죽음이 눈앞에 있는 상황에서 마지막 회유책에도 믿음을 지켜내고야 말았던 하나님을 향한 그 사랑이 우리 한국 교회에 진실하게 머물러 있기를 소망한다.
문종성 (작가·vision-mate@hanmail.net)
[문종성의 가스펠 로드] (42) 틴데일의 숭고한 믿음 - 벨기에 빌보르드에서
입력 2015-02-07 02:5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