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가 이상해. 브레이크가 안 들어.” “엄마, 가드레일에 박더라도 멈춰야 돼.”
순식간이었다. 지난달 4일 한모(68·여)씨는 딸과 함께 벤츠 SUV(ML280)를 몰고 집을 나섰다. 출발 당시 타이어를 점검하라는 표시등이 켜졌지만 운전을 하는 데 이상은 없었다. 서울 원효대교를 지나 삼각지 고가도로에 진입했고, 오르막길이 끝나는 지점에 이르자 ‘일’이 터졌다.
rpm(분당 회전수)이 급격히 올라가면서 차가 앞으로 돌진했다. 브레이크를 밟아도 소용이 없었다. 한씨는 겁에 질렸다. 그대로 내려가면 신호 대기 중인 차들과 충돌할 게 뻔했다. 고가도로 하단에 이르렀을 때 조수석에 앉은 딸이 한씨가 잡고 있던 핸들을 자기 쪽으로 꺾었다. 차는 가드레일을 들이받고도 달렸다. 인도로 돌진해 지하철 환풍구에 부딪혀서야 겨우 멈췄다. 다른 차량과의 대형사고는 피했지만 딸은 어깨와 허리가 부러지고 코뼈가 내려앉았다. 한씨도 갈비뼈에 금이 가고 어깨와 목 등에 타박상을 입었다.
이 차는 지난해 3월에도 비슷한 사고를 냈다. 저녁을 먹으러 간 식당에서 주차할 때였다. 한씨 남편이 브레이크를 밟는 순간 rpm이 치솟았고 그대로 뛰쳐나간 차는 소나무 두 그루를 들이받고 멈췄다. 다행히 인명 피해는 없었다.
급발진이 의심됐지만 벤츠코리아 측은 차에 이상이 없다며 운전자 부주의로 결론을 내렸다. 한씨는 이 말을 믿었다. 그는 “남편이 나이도 많고 해서 실수로 액셀을 잘못 밟았을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며 “오히려 큰 사고에도 사람이 다치지 않았다는 생각에 차를 수리해서 계속 썼다”고 했다.
이번 사고를 겪은 뒤 한씨는 또 급발진 조사를 의뢰했다. 두 번이나 사고를 당하면서 급발진이라는 생각이 강해졌다. 벤츠코리아 측은 한씨 차량의 부품을 독일 본사로 보내 이상 유무 등을 확인하고 있다. 조사 내용과 방법 등은 철저히 비밀이다. 벤츠코리아 관계자는 “급발진 의심으로 사고 조사를 맡기는 분이 간간이 있다”면서도 “급발진으로 확인된 경우는 한 건도 없다”고 말했다.
이 사건을 맡은 서울 용산경찰서도 회사 측 조사 결과를 기다리고 있다. 한씨는 “제조사가 사고 조사를 하는 상황에서 급발진이 인정될 수 있겠느냐”고 우려했다. 김필수 대림대 자동차학과 교수는 4일 “문제 차량을 점검하려면 전문 장비가 필요하다 보니 제조사 장비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이 때문에 조사에 객관성이 떨어지는 건 사실”이라고 말했다.
급발진 의심 사고는 매년 100건 이상 발생하고 있다. 교통안전공단이 집계한 급발진 신고 건수는 2012년 136건, 2013년 139건, 지난해 113건 등이었다. 수입차 중에는 BMW 15건, 벤츠와 도요타가 각각 8건 신고됐다.
그러나 급발진으로 최종 판명된 사고는 없다. 이유는 증거 불충분. 김 교수는 “실제 급발진 발생 건수는 통계에 잡힌 신고 건수의 10배 이상 될 것”이라며 “급발진 사고에 대한 정부와 자동차 업계의 전향적인 접근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황인호 기자 inhovator@kmib.co.kr
[단독] 벤츠 SUV ‘급발진 미스터리’
입력 2015-02-05 02:4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