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1987년 2월, 홍성교도소로 전보 발령을 받았다. 모든 것이 서먹서먹했다. 하지만 전도에 대한 신념은 흔들리지 않았다. 내 손엔 항상 성경책이 들려 있었다. 틈만 나면 재소자들에게 말씀을 펴고 읽어줬고 동료 교도관에게도 복음을 전했다. 국제기드온협회가 제작·보급하고 있는 얇은 신약성경도 여러 권 들고 다니며 나눠줬다.
주변에서는 이런 나를 탐탁지 않게 여겼다. 내가 기도에 너무 열을 올리자 직원들은 나를 다른 곳으로 전출해야 한다는 농담도 던졌다. 한번은 서무과에 근무하는 문서부 부장님이 “본업과 부업을 분간하지 못 한다”며 쓴소리를 했다.
그때 나는 이렇게 대답했다. “우리가 남들을 위해 성실히 생활한다면 재소자들에게도 우리 모습이 그대로 보여 그들 나름대로 많은 것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그때 나는 왜 하나님께서 나를 홍성교도소로 보내셨는지 깨닫게 됐다. 나는 홍성교도소에 신우회를 조직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직전에 근무하던 군산교도소에서도 신우회를 조직하고 전도를 해봤던 경험이 있었다.
신우회 창립예배는 당시 홍성장로교회 장균재 목사에게 부탁을 드렸고 초대 회장으로 이재찬 장로, 부회장에는 지규근 장로, 나는 총무를 맡았다. 신우회를 조직하면서 나는 신학 공부를 병행했다. 전도를 하면서 더 많이 알아야겠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나는 근무조를 바꿔서 야간근무를 자처했고 주간에는 신학교에 다녔다. 당시 교도관 근무는 3부제였다. 24시간을 근무하면 이틀을 쉬었다. 나는 이틀간 쉬면서 지역주민들을 위해서도 전도활동을 했다.
신우회의 최우선 목적은 재소자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이었다. 우리는 감방예배를 드리기로 의견을 모았다. 하지만 쉬운 일이 아니었다. 당장 교도소 당국은 반대했다. 26.4㎡(8평) 남짓한 감방에서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른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우리는 믿음으로 들어갔고, 매주일 예배를 드렸다.
예배에는 신우회장과 총무가 들어갔다. 감방 안에 들어서자 악취가 진동했다. 화장실 냄새였다. 당시만 해도 감방 내 화장실은 수세식이 아니라 재래식이었다. 화장실 문을 꼭 닫아도 냄새가 새어나왔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였다. 냄새가 모두 배었는지 전혀 불쾌하지 않았다.
재소자들의 반응은 회가 거듭될수록 뜨거웠다. 그들은 성경 말씀을 들으며 눈물을 흘렸고 함께 기도하면서 자신들의 죄를 회개했다. 어떤 재소자는 자신이 경찰과 검찰에서도 자백하지 못한 죄가 있다며 굵은 눈물을 떨어뜨리며 용서를 구했다. 우리는 그들의 고백과 기도에 힘을 얻었고 어떻게 하면 더 많은 재소자들에게 주님의 사랑을 선사할 것인지 기도했다. 감방예배가 거듭되면서 화장실 냄새는 향기로 변했다. 신기했다. 8평 공간에는 40명이 넘게 예배를 드렸다.
얼마 후 신우회장이 정년퇴임하면서 나 혼자 예배를 인도하게 됐다. 그런데 동역자 없이 감방에 들어서자 두려움이 엄습해왔다. 재소자들이 무섭게 느껴졌다. 그래서 호신용 기구를 가슴에 품고 예배를 인도했다. 그러기를 몇 달, 어느 날 감방에서 나와 먼 하늘을 보는데 구름 사이로 십자가 형태의 빛이 나왔다. 마치 내가 제주에서 통회자복할 때의 빛 같았다. 그리고는 음성이 들렸다. “내 양을 치라. 내 양이 너를 물겠느냐?”
음성 앞에 나는 참회했다. 그 일이 있은 후 두려움 없이 예배를 드렸다. 더없이 뜨거운 은혜로 재소자들을 섬길 수 있었다. 호신용 기구만 생각하면 아직도 창피하다. 그때 함께 예배 드렸던 형제들에게 사죄하고 싶다.
정리=신상목 기자 smshin@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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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15-02-06 02: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