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12월 출간된 ‘지적 대화를 위한 넓고 얕은 지식’(이하 지대넓얕)은 여러모로 이례적인 책이다. 인문서로는 아주 오랜만에 베스트셀러 종합순위 상위권에 올라 있다. 나온 지 두 달도 안 지났는데 벌써 6만부가량 팔렸다. 출판사에서는 앞으로 한두 달 안에 10만부 돌파가 가능할 것으로 보고 있다. 인문서 시장에 대형 신작이 등장한 것이다.
‘채사장’이라는 필명을 쓰는 저자는 완벽한 무명이다. 이 책이 첫 책이다. 인문학자나 저술가도 아니다. 미혼에 33세. 출판사 투고를 통해 책을 냈다.
이 책은 언론에 소개된 적도 없다. 출판사가 특별한 마케팅을 한 것도 아니다. 저자가 운영하는 팟캐스트 방송을 통해 출간 소식을 알렸고, 책을 본 사람들이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로 입소문을 퍼트리면서 열풍으로 번졌다.
‘지대넓얕’ 2권이 출간된 3일 저녁 서울 이태원 한 카페에서 저자를 만났다. 1권이 역사, 경제, 정치, 사회, 윤리 등 현실 세계의 인문학을 다루었다면 이번에 나온 2권은 철학, 과학, 예술, 종교, 신비 등 현실 너머의 인문학을 요리한다.
“2011년에 친구들과 제주도 여행을 갔다가 교통사고를 크게 당했어요. 사고 소식이 지역 방송에도 나왔죠. 2명이 죽었고 1명이 중상이었어요. 그 사고 이후 잠을 제대로 못 자고 불안감에 시달리게 됐어요. 내가 발 딛고 서 있는 세상이 너무 불안하고 위험하다고 느꼈죠. 이 세계가 명쾌해지면 내가 좀 안정되겠다 싶어서 글을 쓰기 시작했어요. 말하자면 나를 위해 글을 쓴 거죠. 남들에게 읽힐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진 못 했어요.”
채사장은 자신이 글로 정리한 얘기들을 주위의 고민하는 동료들에게 들려주기도 했는데 뜻밖에도 반응이 무척 좋았다고 한다. 지난해 4월 팟캐스트를 시작한 건 동료들이 부추김 때문이었다.
“친구들을 위한 힐링 방송으로 몇몇이서 팟캐스트를 시작했는데, 듣는 사람들이 꽤 많아지더라고요. 책을 내볼까, 그런 생각이 들었죠.”
그는 집에 있는 책들을 들춰서 출판사 전화번호를 알아냈다.
“하루에 10곳씩 투고하기로 했어요. 한 1000군데 보내면 그래도 어디선가 연락이 오지 않을까 기대하면서.”
그러나 출판사는 금방 구해졌다. 처음 원고를 보낸 10개 출판사 중 3곳에서 책을 내자는 연락이 온 것이다.
첫 책으로 베스트셀러 작가가 된 채사장은 “사람들이 왜 제 책을 읽는지 궁금하다”고 여러 번 얘기했다. 저자에게도 출판사에게도 출판계에서도 ‘지대넓얕 열풍’은 예상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한 가지 일치하는 분석이 있다면 제목의 힘이다. ‘넓고 얕은 지식’이라며 노골적으로 B급 정서를 풍기는 것은 점잖은 인문서 시장에서는 전례가 없었던 파격이었다.
“사람들이 제목을 좋아하는 것 같아요. 그동안 인문학 책들이 너무 독자들을 겁먹게 했다고 생각해요. 독자들에게 가르치려고만 했지 독자들이 그것을 가지고 놀게 해주지 못했어요.”
그는 “인문학도 쉽게 얘기할 수 있는데 변형이나 왜곡에 대한 공포 때문에 기존 저자들은 그렇게 하지 않으려고 했던 것 같다”면서 “이 책은 나를 위해 쓴 글이기 때문에 변형이나 해석을 많이 자유롭게 넣을 수 있었다”고 덧붙였다.
이어 “인문이나 교양의 본질은 넓고 얕은 지식”이고 “어른들을 위한 놀이”라는 새로운 관점을 제시했다.
“개인에게 영혼의 문제는 너무나 크고 중요해요. 그에 비하면 일상은 사실 작은 것이죠. 그런데 우리는 일상에만 매달려 살아가요. 대화도 일 얘기, TV 얘기, 가족 얘기뿐이죠. 그러다 보니까 지적인 대화, 우리 영혼과 관련된 대화에 대한 갈증이 있는 것 같아요. 저는 그런 대화를 ‘지적 대화’라고 표현한 것이고, 지적인 대화를 위해서는 공통분모가 필요한데 그 공통분모가 인문학이고 교양이라고 생각하는 것이죠.”
글을 써봤냐는 질문에 채사장은 “책만 좀 읽었다”고 답했다.
“성균관대 국문과를 졸업했는데, 학교 공부가 별로 재밌지 않았어요. 졸업할 때까지 3년간을 도서관에서 책만 읽으며 보냈죠. 하루에 한 권씩 읽었던 것 같아요. 다들 취업 준비하고 그랬는데 저는 아무 대책도 없이 책만 보고 빈둥거렸어요. 현실감각이 없었다고 할 수 있죠. 어쩌면 현실을 피하고 싶었고, 그 도피처가 책이 되었던 건지도 몰라요.”
대학을 졸업한 뒤로는 돈 버는 일에만 매달렸다. 학원에서 논술강사를 했고, 주식투자나 부동산 임대업도 했다. 돈도 조금 모았다. 그러다가 2011년 교통사고를 겪었고, 그 사고는 그를 다시 책의 세계로 돌려놓았다.
‘지대넓얕’의 인기에는 독특한 제목, 쉬운 글쓰기 외에 방대한 영역을 아우르는 지적 편력도 한 요인으로 꼽힌다. 이 책을 출판한 한빛비즈의 편집자 권미경씨는 “여러 분야를 다 아우르면서 그걸 쉽게 쓰는 저자는 국내에 극히 드물다”고 말했다. 채사장의 비결은 역시 독서였다.
“저는 늘 지금 상태에서 가장 멀고 불편한 책을 읽으려고 했어요. 기독교인이라면 이슬람에 대한 책을 읽는 식이죠. 가장 불편한 책이 가장 좋은 책이라고 생각해요. 가장 불편한 책이 가장 빠르고 크게 자신을 확장시켜 줄 것이라고 믿어요.”
채사장은 본명을 밝히길 꺼렸다. 직업에 대해서도 “지금은 글 쓰는 사람”이라며 자세히 설명하지 않았다.
김남중 기자 njkim@kmib.co.kr
[책과 길] 무명 작가가 쓴 첫 책 ‘대박’… “제목이 한몫했죠”
입력 2015-02-06 02: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