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김봉래 (4) 재소자 전도 원칙 “나이와 죄명을 묻지 말라”

입력 2015-02-05 02:49
2005년 교도관으로 정년퇴임한 김봉래 목사가 이영의 사모와 함께했다.

나는 지금까지 교도소 전도에 원칙을 갖고 있었다. 그중 하나는 재소자들의 나이와 죄명을 묻지 않는 것이다. 그들의 범죄 사실을 구체적으로 알게 되면 선입견 때문에 전도에 지장이 생겨서다. 교도관 시절부터 그랬다. 나는 담 안 형제들과 교제할 때부터 그들이 어떤 죄를 지었는지 알려고 하지 않았다. 알게 되더라도 잊으려고 했다. 주님도 우리의 죄를 묻지 않으셨다.

아내는 이런 나를 이해해줬다. 아내는 내가 규칙적인 생활을 할 수 있도록 애썼다. 텔레비전에서 방영하는 드라마나 쇼, 예능 프로그램도 멀리했다. 아내는 뉴스를 챙겼고 늘 조용히 내 곁에 있어줬다. 그러던 아내가 16년 전 자궁에 혹이 생겨 큰 수술을 받았다. 자궁 혹은 아내의 목숨까지 위태롭게 할 정도로 심각한 상태였다. 나는 온 몸에 힘이 빠지고 안절부절못하는 지경이 됐다. 모두 내 잘못처럼 느껴졌다. 나는 하나님께 매달릴 수밖에 없었다. 제발 아내의 목숨만은 살려달라고 기도했다.

“주님, 혹시 수술이 잘못되어 아내가 반신불수가 되더라도 좋습니다. 아무것도 못하는 허수아비가 되어도 좋습니다. 제발 목숨만 살려주세요.”

수술 날짜가 다가올수록 낮이나 밤이나 아내를 위해 기도했다. 나는 한번도 물질적으로 정신적으로 아내를 풍족하게 해주지 못했다. 참 나쁜 남편이었다. 그래도 아내는 바가지 한번 긁지 않고 묵묵히 동반자가 돼주었다.

드디어 수술 당일. 4시간 수술은 1000년처럼 길었다. 수술실 앞에서 기다리며 그동안 아내와 함께했던 시간이 주마등처럼 지나갔다. 홍성에 처음 와서 가진 것이 없어 다음날 끼니를 걱정하던 시절이 생각났다. 나는 공무원증을 쌀집에 맡겨놓고 쌀 한 말을 팔았고 아내는 그 쌀로 밥을 지었다. 아내는 그때 내게 힘을 내라며 긴긴 인생에 할 얘깃거리가 많겠다고 미소 지었다.

아내는 내가 재소자들에게 영치금을 넣어주어야 한다면 단 한번도 반대하지 않았고 자신이 금식하며 저축해 두었던 돈까지 내어주며 격려했었다. 아내는 내가 신학 공부를 할 때도 학우들이 집을 찾으면 언제든 간식을 만들어 주었고 웃음과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

당시 수술은 서울대병원에서 받았다. 수술이 잘 되면 빨간색 이름에서 파란색 이름으로 바뀌어 회복실로 옮겨지는데 갑자기 빨간색 아내 이름이 보이지 않았다. 아무리 찾아도 아내 이름이 없었다. 나도 모르게 수술실 문을 박차고 뛰어들어갔다. “어떻게 된 겁니까”라고 소리쳤다.

그러자 황당하게 나를 바라보던 간호사가 빨개진 얼굴로 “죄송하다”고 했다. 나는 더 놀라 “아내가 어떻게 된 겁니까”라고 재차 물었다. 간호사는 “그게, 저어…”만 했다. 앞이 캄캄했다.

“정말 죄송합니다. 저희가 서로 얘기를 하다가 환자 이름을 입력시킨다는 게 그만. 죄송합니다. 수술은 잘 됐습니다. 정말 잘 됐어요.”

단 몇 초간이었지만 천국과 지옥을 오가는 경험을 했다. 나는 간호사가 가리키는 쪽으로 재빨리 시선을 돌렸다. 아내는 신음을 하며 눈을 감고 누워 있었다. 아직 마취에서 깨어나지 못한 아내를 보고 눈물이 솟구쳤다.

“주님. 감사합니다. 아내의 생명을 살려주셨군요. 고맙습니다. 어떤 역경이 오더라도 아내와 함께 주님만 믿고 살겠습니다.”

나는 감사의 기도를 드렸다. 감사하게도 집사람은 회복이 빨랐다. 아내는 6년 전에는 갑상선암 수술도 받았다. 그때도 깜짝 놀랐다. 하지만 주님의 신실한 역사를 지켜봤기에 낫게 하실 것이란 확신이 있었다. 아내는 지금도 홍성교도소교회에서 반주를 돕고 있다.

정리=신상목 기자 smshi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