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융 당국과 범금융권 수장, 벤처기업 대표들이 한자리에 모여 한국 금융의 발전방안과 관련해 난상토론을 벌였다. 하지만 ‘범금융 대토론회’라는 명칭과는 걸맞지 않게 ‘핀테크(IT+금융) 활성화’ ‘기술금융’ 등 정부가 주도하는 정책과제 중심의 논의에 치우쳤다는 지적이 나온다. 특히 박근혜 대통령이 지난달 15일 업무보고 때 “금융혁신 관련 브레인스토밍이 필요하다”고 말한 이후 급박하게 토론회를 준비하다 보니 형식에 치우쳐 금융권이 정작 하고 싶은 말을 허심탄회하게 쏟아내기엔 한계가 있었다는 평가다.
◇신제윤, “금융권의 위기의식 필요”=금융위원회와 금융감독원은 6개 금융협회와 공동으로 3일 서울 중구 예금보험공사에서 ‘대한민국 금융의 길을 묻다’라는 주제로 6시간 동안 범금융 대토론회를 개최했다. 금융 당국뿐 아니라 지주·은행·저축은행, 증권·자산운용, 보험, 카드·캐피털, 금융공공기관 수장들과 벤처업계 대표 등 108명이 총출동했다. 신제윤 금융위원장은 “거대한 변화의 흐름을 읽지 못하고 기존의 틀만 고집하다가는 미래가 없다는 절실한 위기의식을 가져야 한다”며 “금융권 스스로 혁신전쟁에서 살아남아 성장하기 위해 ‘개혁의 상시화’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토론은 핀테크 활성화방안에 집중됐다. 애초 정부가 혁신방향을 핀테크와 기술금융으로 설정한 만큼 초저금리 시대 수익성 악화로 고전하는 금융사들의 현실적인 고민을 털어놓고 공유할 수 있는 자리는 없었다. 핀테크 업계에서는 기술기업에 대한 과감한 지원을 요청했다. 이승건 비바 리퍼블리카 대표는 “애플페이 등 해외의 성공적인 핀테크 사례 뒤에는 항상 함께하는 금융기관이 있었다”며 “핀테크는 금융기관과 기업 모두가 이익을 만드는 윈-윈 비즈니스”라고 강조했다. 맥킨지의 리처드 돕스 글로벌연구소장은 “금융사들이 ‘핀테크 공격수’를 두고 스스로를 공격하지 않으면 다른 이들이 공격할 것”이라며 “금융당국과 금융사 모두 달라져야 한다”고 주문했다. 정부 정책 효과가 현장에서 체감되지 않는다는 불만도 나왔다. 이성우 옐로페이 대표는 “정부의 모험투자 노력이 현장에서 체감되지 않고 에인절투자를 만나기도 하늘의 별따기”라고 말했다. 정부는 ‘보여주기식’이라는 비판을 의식한 듯 쌍방향 토론 형태로 진행했다. 토론회에서는 벤처기업이 금융사와 금융 당국에 하고 싶은 말, 금융사가 금융 당국에 바라는 부분에 30여분씩 배정됐다.
◇금융권, 정부 정책과제에 밀려 속 깊은 얘기 꺼내기 어려워=금융권 수장들이 모여 금융산업 발전방향을 토론할 수 있는 기회가 마련됐지만 정작 금융권의 고민을 드러내기엔 역부족이었다. 금융권 관계자들은 금융 당국의 기술금융 속도전에 부담감을 느낀다고 토로하지만 이번 대토론회에서 관련 요청이나 개선방안 등은 구체적으로 언급되지 않았다. 토론회 전부터 100여명을 모아놓고 토론한다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된다는 비판도 나왔다. 한 시중은행 부행장은 “CEO들을 다 모아놓은 자리에서 진짜 속 얘기를 할 수 있겠느냐”며 “그런 얘기를 했다가는 당장 정부 눈 밖에 나게 될 것”이라고 지적했다.
되레 은행 혁신성 평가에서 1위를 차지한 신한은행이 기술금융 추진 사례와 중장기 로드맵을 우수사례로 발표하면서 다른 은행들의 부담은 더 커졌다. 이런 부담감은 토론회 2부에 배정된 사례발표에 앞서 금융권이 제출한 자료목록에서도 읽힌다. 특히 은행들이 제출한 자료에는 기술금융을 주제로 다룬 곳이 유독 많았다. 최근 발표된 은행 혁신성 평가에서 낮은 점수를 받았던 스탠다드차타드(SC)은행도 ‘미래에 투자하는 기술금융 투자’를 주제로 내세웠고, 지방은행들도 기술금융에 초점을 맞췄다.
증권·자산운용사들도 ‘핀테크를 접목한 금융혁신’ ‘중소·중견기업 지원' 등 정부의 정책방향에 맞춘 모험자본 육성을 주로 다뤘다. 이에 대해 금융위 관계자는 “사별로 다른 기관과 공유하고 싶은 내용을 제출한 것”이라며 “자료 중에서 업권별로 최근에 이슈화되고 있는 부분들을 위주로 선정했다”고 말했다.
6시간 이상 계속된 토론 중 금융권이 그나마 제 목소리를 낸 시간은 금융 당국의 감독·검사 혁신을 주문할 때였다. 금융기관들은 그간 감독당국에 쌓인 불만들을 작심한 듯 쏟아냈다. 금융 패러다임의 변화를 다룬 세미나 때 발언 못지않게 금융당국의 불합리한 규제를 풀어 달라는 현장의 목소리가 많았다. 주된 요청사항은 큰 틀에서 열거주의(포지티브·Positive) 방식의 감독을 금지항목만 명시하는 포괄주의(네거티브·Negative) 방식으로 바꿔 달라는 것이다. 관행적 종합검사를 절반 이상 줄이고 감독 방식도 사후적발 검사를 사전예방 감독으로 바꿔 달라는 의견도 포함됐다. 임종룡 NH농협금융지주 회장은 “명문화돼 있지 않은 규제, 구두지도는 금융사가 가장 아픈 부분”이라며 “이런 걸 명문화하고 규정화할 수 있는지 당국이 고민해야 한다”고 꼬집었다.
백상진 기자 sharky@kmib.co.kr
정부 “핀테크” 외치며 일방통행… 할말 못한 금융권
입력 2015-02-04 02: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