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6인의 반공포로’ 김남수씨 꽃동네서 질곡의 삶 마감

입력 2015-02-04 02:56

“한국전쟁과 조국 분단이라는 현대사의 아픔을 고스란히 떠안고 세상을 떠나 너무 안타깝습니다.”

3일 충북 음성 꽃동네에 따르면 지난 2일 꽃동네 인곡자애병원에서 반공포로 출신 김남수(83·사진)씨가 숨졌다.

그의 인생은 우리나라의 아픈 현대사가 그대로 투영돼 있어 주위 사람들의 가슴을 아프게 했다. 그는 한국전쟁 이후 남과 북을 모두 포기하고 중립국행을 선택한 포로 76명 중 한 명이다.

강원도 고성에서 태어난 김씨는 중학교 3학년(당시 17세) 때 6·25가 터지자 인민군의 징집을 피해 피신생활을 했다. 함경남도 원산에서 국군에게 잡히는 과정에서 인민군으로 몰려 포로 신분이 됐고 거제도 포로수용소로 이송됐다.

당시 거제 포로수용소는 좌익과 우익으로 나눠 전쟁터보다 더 살벌한 싸움이 벌어졌다. 1953년 반공포로 석방조치가 이뤄지자 그를 포함한 76명의 포로는 형제끼리 총부리를 들이대는 처참한 전쟁이 싫다며 제3국행을 택했다.

그는 인도, 아르헨티나를 거쳐 브라질에 정착했다. 빈손으로 시작한 타국에서의 생활은 고통의 연속이었다. 자신을 ‘조센진’이라고 비하하는 일본인을 살해했고 27년간 감옥과 정신감호소 등을 전전했다.

1993년 6월 MBC가 76명의 포로를 특집방송으로 다루면서 그의 소식이 국내에 알려졌고, 귀환운동으로 이어졌다. 당시 김수환 추기경까지 나서 힘을 보태면서 그는 94년 2월 석방돼 41년 만에 조국의 품으로 돌아왔다.

오랜 수용생활 등으로 과대망상증 등 정신질환을 앓는 상태에서 조국으로 돌아온 그가 갈 곳은 없었다. 그를 받아 준 곳이 음성의 꽃동네였다. 이후 20여년 동안 꽃동네 요양원 등에서 생활하던 그는 83세의 일기를 끝으로 한 많은 생을 마감했다.

꽃동네는 4일 꽃동네 대성당에서 오웅진 신부의 집전으로 장례미사를 할 예정이다.

음성=홍성헌 기자 adho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