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온의 소리-정종성] 성서가 말하는 甲乙문화

입력 2015-02-04 02:36

최근 우리 사회를 발칵 뒤집어 놨던 모 항공사 부사장의 ‘땅콩회항’ 사건이나 경기도 부천 어느 백화점 주차장에서 벌어진 모녀(母女)의 ‘주차 알바생 무릎 꿇리기’ 사건 등은 힘을 가진 ‘갑(甲)’이 사회적 약자들에게 얼마나 부당한 횡포와 인격적 모독을 가하는지를 적나라하게 드러낸 사건이라 할 만하다.

한 조사에 따르면 오늘날 한국의 직장인 80%가 자신을 ‘을’(乙)로 규정했다. 힘을 가진 갑에게 복종할 수밖에 없다는 ‘을의 문화’가 일상이 되어 버린 치욕적인 현실을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소위 을‘사’조약(乙‘死’條約)이라는 비인간화가 이어져온 인간 문명을 생각할 때 사실 이런 현상이 새로운 것은 아니다. 성서는 인간 세계가 보편적으로 자행해온 이 같은 타락상에 대해 처음부터 일관되게 경고하고 있기 때문이다.

십계명으로 요약되는 모세의 율법은 ‘을’을 보호하고 ‘갑질’을 방지하기 위한 계명이자 복음이었다. ‘하나님 사랑’에 대한 첫 돌판의 네 계명들은 단순히 유일신의 배타성이나 우상숭배·혼합주의에 대한 경고를 뛰어넘어 보다 근본적인 지향점을 설정하고 있다는데 의미를 지닌다. 즉 오직 창조주만을 유일한 지배자로 인정함으로써 그 외의 피조물이 주장하는 모든 주권을 상대화하고 있다. 이는 어느 누구도 공동체의 구성원들을 ‘을’로 낙인찍거나 비인간적으로 대할 수 없다는 선언이나 마찬가지다.

물론 ‘이웃사랑’에 대한 둘째 돌판의 여섯 계명들이야말로 구성원들간 관계에서 갑의 패권을 인정하지 않는다. 오히려 을의 ‘경제적 자원과 권리를 보호해주라’는 직접적인 명령이거나 경제적 측면을 진지하게 고려하고 있는 간접 명령이었다.

성경 속 ‘젊은 부자 관원에 대한 사건’(막 10:17∼22)을 보면 예수께서 영생의 방법을 묻는 젊은이에게 갑으로서의 무감각한 삶을 깨우치면서 바로 이 6가지 계명들을 처방하셨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는 사건 속의 부자청년처럼 ‘내가 어려서부터 모두 잘 지켜왔다’고 당당하게 주장할 만큼 계명의 본질에 무감각한 채 살고 있다. 예컨대 신자유주의를 배경으로 한 작금의 세계화나 자유무역협정(FTA)처럼 합법을 내세운 정부와 다국적 ‘슈퍼갑’ 기업들이 을을 향해 휘두르는 구조적 약탈과 무자비한 갑의 횡포를 보면서도 문제의식이나 자각 증상이 없는 것과 같다.

이른바 ‘갑질 방지’를 위한 계약의 전통에 무감각해져 하나님을 몰아내고 스스로 갑의 자리, 신(神)의 자리에 오른 종교 권력자들을 향해 경고하며 분노하셨던 분이 예수 그리스도였다.

예수님은 산상수훈(마 5∼7장)과 그 핵심인 주기도문(마 6:9∼13)으로 대표되는 메시아적 선포를 통해 종교적 위선과 갑의 횡포, 그리고 영적 무감각의 덮개를 걷어냈다. 그리고 그 안에 갇혀 신음하는 사회경제적 ‘을’을 주목하도록 했다.

특히 그의 십자가는 하나님이 스스로 ‘을’이 됨으로써 메시아가 되신 사건이다. 그래서 예수님을 심판주로 묘사하고 있는 모든 신약성서는 공통적으로 인간들의 부당한 ‘갑의 횡포’에 대한 죄를 철저히 따져 묻겠다는 강력한 심판과 처벌의지를 근간으로 하고 있다. 바울 역시 갑의 횡포가 만연했던 로마제국을 겨냥하며 권력자를 후견인으로 삼아 갑의 횡포를 부리며 살아가던 제국주의 방식(일명 후견인 제도)의 포기를 교회에 간곡히 당부하고 있다(롬 12:1∼3).

사회 전반적으로 갑을 구조가 심화되고 성직의 계급·사유화 또한 가속화되고 있다. 이 같은 상황 속에서 교회는 스스로 ‘갑’의 패권자가 된 상태에서 ‘갑질 방지’의 복음을 가르치고 있다는 혼란과 모순 속에 처해 있다. 종교의 기능은 ‘갑’의 횡포를 막고 ‘을’을 보호하는 데 있다. 그렇다면 십계명은 우리의 손과 발에 억울한 ‘을’의 피가 묻어 있는지, 아니면 갑의 횡포를 막기 위해 기꺼이 흘린 땀이 묻어 있는지 살피는 현미경으로 여전히 우리 곁에 머물러 있어야 하지 않을까.

정종성 교수(백석대 기독교학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