캠프 킴, 유엔사령부, 수송부 등 서울 용산기지에 대한 정부의 투자 활성화 대책이 발표되면서 부동산 경기가 살아날 조짐을 보이고 있다. 무조건 높은 건물, 혹은 최대한 많은 면적을 확보하기보다 유엔사령부나 수송부의 경우 남산 조망을 해치지 않는 범위에서 개발할 계획이란다. 캠프 킴의 경우 800% 이상의 용적률을 적용해 고밀도로 개발함으로써 미군기지 이전에 따른 비용 3조400억원을 충당할 것이라고 한다.
이 같은 용산기지 개발은 중심 영역이라 할 수 있는 사우스 포스트, 메인 포스트, 캠프 코이너 지역을 보존할 수 있는 재원을 마련한다는 측면에서 나름 설득력이 있다. 그런데 한 가지 아쉬운 점은 용산의 역사적 가치를 개발 전략으로 담아낼 준비가 불분명하다는 것이다.
사람의 흔적이 담기지 않았던 ‘두바이’와 19∼20세기 한반도 내 세계사가 압축적으로 표현된 ‘용산’의 개발은 근본적으로 다른 출발이 필요하다. 영화 ‘국제시장’에서 나타난 것처럼 굴곡진 우리나라 역사는 무한한 문화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 용산은 ‘국제시장’이 담은 내용보다 훨씬 더 동적인 역사를 품고 있다.
근·현대사 아픔이 준 최고의 선물
19세기 말 조선은 육로를 통한 중국과의 관계에서 벗어나 바다를 통해 일본 러시아 미국 영국 프랑스 독일 등과 다각적으로 국제관계를 맺게 되었다. 일본은 일찌감치 용산의 지역적 가치를 인식했다. 1882년 임오군란에서 시작해 한반도에서 일어난 모든 정치적 사건의 배후였던 일본군을 1904년 러일전쟁을 계기로 경의선이 시작되는 이곳에 집중시켰다.
1906년 7월부터 건설을 본격화한 용산기지는 1913년 1차적으로 마무리한다. 이때 일본은 기동력 있는 기 병영, 보 병영, 포 병영과 연병장 그리고 병기지창을 도성에 가장 근접하게 배치해 조선을 식민지로 만들기 위한 군사 전략을 보여주었다.
이윽고 조선이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되자 1914년, 520년간 유지되던 원형 성곽 중심의 한양은 용산을 포함한 ‘땅콩형 도시’로 탈바꿈하게 된다. 이어 1915년부터 1922년까지 7년여에 걸쳐 상주군 체제로 일본군이 주둔하면서 용산은 중국대륙 침략을 위한 후방기지로 바뀐다. 1931년 이후에는 모든 인적 물적 자원을 동원해 중국 침략과 태평양전쟁 수행을 위한 기지로 용산을 변모시켰다. 개발 논의의 핵심 지역으로 부각된 캠프 킴의 경우 경의선 철도와 직접 연계된 육군창고와 병기지창 지역으로 전쟁 수행을 위한 물류 시스템의 중심이 되었다.
문화유산에 현대적 가치 부여하자
일제 강점에서 벗어난 이후 용산에는 또다시 1950년 6·25전쟁 이후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하려는 한국과 미국, 그리고 유엔군의 노력이 고스란히 담기게 되었다. 유엔사령부 역시 세계 각국으로부터 온 수많은 사람의 고귀한 희생이 함축돼 있다. 용산기지의 군 시설 건축물들은 지난 100여년간의 역사적 실체를 증언하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역사적 흐름을 고스란히 간직하면서 한 나라의 수도에 118만평의 광활한 대지가 남아 있는 경우는 세계적으로도 흔치 않다. 다소 역설적으로 들릴지 모르겠지만, 어쩌면 100년간의 굴곡진 한국 근현대사의 아픔이 우리에게 남겨준 최고의 선물이 용산인지도 모른다.
따라서 캠프 킴이나 유엔사는 단지 빈 땅을 개발하는 방식이어서는 안 된다. 그곳에 담겨 있는 아픈 역사를 현대적 가치로 새롭게 담아내야 한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러일전쟁 이후 한국 침략에 대한 일본의 실체와 20세기 중후반 냉전 이데올로기 속에서 한국과 미국 그리고 유엔 등이 대응해 온 인류문화 자산을 우리 스스로 지워내는 결과가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김종헌(배재대 교수·배재학당역사박물관장)
[청사초롱-김종헌] 용산기지 개발, 역사 담아내야
입력 2015-02-04 02: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