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타짜’ 복사판?… 꽃뱀·선수·꽁지 등 역할 분담

입력 2015-02-03 02:43

2011년 10월 위모(72)씨는 강원도 속초 H리조트에서 ‘돼지 먹기 고스톱’ 판에 끼었다. 고스톱을 치다가 돼지가 그려진 화투패만 갖게 되면 다른 참가자들로부터 10만원씩 받는 식이었다. 단순한 규칙에 빠져든 위씨는 그 자리에서 6500만원을 빌렸다가 모두 잃었다.

단지 운이 나빴다고 여긴 위씨는 그 다음달 충북 제천의 한 별장에서 다시 돼지 먹기 고스톱 판에 꼈다. 이번에는 ‘돼지’ 판돈이 200만원씩으로 올랐고, 위씨가 빌렸다 탕진한 돈도 2억8000만원으로 늘었다. 돈을 빌려준 이는 인심을 쓰듯 3000만원을 뺀 2억5000만원만 갚으라고 했다.

위씨는 차용증을 쓸 때까지도 이 고스톱 판에 ‘타짜’가 앉아 있는 줄 몰랐다. 한 70대 남성은 위씨를 제외한 다른 사람에게 교묘히 ‘돼지’를 나눠줬다. 위씨에게 “바람이나 쐬러 가자”던 서모(63·여)씨는 사실 세상물정 모르는 이를 도박판에 끌어들이는 ‘꽃뱀’ 역할이었다. 서씨는 큰 판돈에 불안해하는 위씨에게 은밀히 “우리는 같은 편”이라며 안심시키기도 했다.

계속 돈을 빌려준 사람은 애초부터 위씨를 채무자로 만들도록 섭외된 ‘꽁지’였고, 요란하게 떠들던 60대 여성 2명은 바람을 잡는 ‘선수’였다. ‘설계’된 판에서 위씨는 세칭 ‘호구’였다. 위씨는 검찰 조사에서 “참석자들이 음료수를 건넸는데, 판단력을 흐리게 하는 약이 타져 있던 듯하다”고 말했다.

영화 ‘타짜’를 그대로 옮겨 놓은 듯한 이 사기도박의 배후에는 ‘명동 사채왕’ 최모(61·수감 중)씨가 있었다. 최씨는 사기도박단이 위씨에게 2억5000만원을 추가로 뜯어낸 제천 별장을 도박 장소로 제공하고, ‘전주’로서 도박 밑천 1억원도 댔다. 최씨는 2010년 2∼12월 대부업체를 불법 운영하기도 했다. 그는 조모씨 등 2명에게 200억원을 단 하루 빌려 주고 이자로 4억8000만원(연이자율 876%)을 챙기는 등 30차례에 걸쳐 법정이자율 상한선(연 49%)을 넘어선 고리로 돈을 빌려주고 18억5970만원을 챙긴 것으로 조사됐다.

최씨는 공갈, 마약 등 혐의로 구속돼 3년 가까이 재판을 받는 중이다. 최근에는 현직 판사와 검찰 수사관 2명에게 뇌물을 준 혐의가 드러났다. 최모 판사는 구속됐지만 검찰 수사관 2명에 대한 구속영장은 2일 기각됐다. 서울중앙지검 강력부(부장검사 강해운)는 이날 대부업법 위반 혐의로 최씨와 최씨의 형(65)을 추가 기소하고, 최씨 별장에서 벌어진 도박판의 ‘선수’ 3명도 사기 혐의로 함께 재판에 넘겼다.

이경원 기자 neosari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