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김봉래 (3) “탕자가 돌아왔습니다” 고백에 신기한 체험

입력 2015-02-04 02:07
김봉래 목사 가족이 지난해 가을 담양으로 여행을 떠났다. 오른쪽부터 아들 성연, 김 목사, 이영의 사모, 딸 선경, 며느리 이명선씨.

나는 전남 함평군의 영화촌이라는 작은 마을에서 태어났다. 우리 집은 기독교와는 거리가 멀었다. 부모님은 꼬박꼬박 제사를 지내며 조상을 섬겼다. 어머니는 가끔 절에 다니시며 ‘기도 공력’을 쌓으셨다. 3남 1녀나 되는 자녀를 키우면서 제사로는 모자랐던 것 같다.

내가 교회를 처음 접한 것은 군에 입대하면서다. 어떤 강한 신앙의 힘도 아니었지만 세례까지 받게 됐고 예배에도 참여했다. 하지만 제대 후엔 원래 생활로 돌아갔다. 20대 초반이었으니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넘쳤고 ‘교회쯤’은 안 나가도 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인생에 대한 막연한 기대와 두려움은 동전의 양면처럼 상존했다.

그러다 진정한 신앙을 갖게 되었는데 우연한 계기를 통해서였다. 중병에 걸려서도, 감동적 전도를 받거나 간증을 통해서도 아니었다. 나는 젊은 패기와 그럭저럭 먹고사는 것에 큰 걱정 없던 집안 덕분에 젊음의 시간을 낭비했다. 친구들과 술을 마시고 싸움질을 한 적도 허다했다. 무슨 연유에서인지 성실히 사는 인생에 대해서도 회의적이었다. 도대체 왜 그렇게 살아야 하나. 누가 보상해주나 생각하며 깊은 상실감에 젖었다.

그런 상실감은 하지 말아야 할 일을 자초했다. 나는 목적 없이 흘러가는 날들이 싫어 몇 번이고 죽음의 문턱까지 갔다 돌아왔다. 1975∼76년 나는 두 번의 자살 시도를 했었다. 물론 모두 실패했다. 당시 교도관으로서 제주교도소에 발령을 받았는데 교도관 생활도 후회가 밀려왔다. 온갖 죄를 지은 나쁜 놈들이 감방에 모여 있다고 생각했고 1년은 극심한 소외와 거부감 속에서 일을 했다.

주님을 만난 것은 그 무렵이다. 나는 정말 뜻하지 않게, 설명할 수 없는 묘한 인도함에 이끌려 교회를 찾았다. 그것은 아주 신비로운 체험이었다. 내 마음이 저절로 예배당으로 발걸음을 옮기게 했다. 그 교회는 제주도 한라교회로 지금은 없어졌다.

나는 예배당 의자에 털썩 앉아 “하나님, 여기 탕자가 돌아왔습니다” 하고 말했다. 긴 한숨과 함께였다. 아마 기도의 첫 부분이었을 것이다. 그러고는 눈물을 흘렸다. 얼마동안 그렇게 앉아서 울며 기도했는지 모르겠다. 내 몸 속에 있던 쓰레기 같은 불순물이 몸 밖으로 빠져나오는 것을 느꼈다. 스치고 지나가는 과거의 일들. 군에서 세례 받은 게 우연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나는 그때부터 제주 성안교회를 다니며 신앙생활을 했다.

본격적인 믿음의 성장은 평생 신앙의 동반자였던 아내를 만난 후부터다. 교회를 나가게 되면서 어느 날 피아노 반주자가 눈에 들어왔다. 어찌 그리 심금을 울리는 연주를 하는지 주일마다 인상을 받았다. 그러면서 ‘저 자매와 꼭 결혼해야겠다’는 결심을 했고 1년 후 이뤄졌다. 77년 12월, 우리는 결혼식을 올렸다. 처가는 믿음의 가정이었다. 그때까지도 내가 교회 나가는 것을 탐탁지 않게 여기던 어머니도 아내를 만나 신실한 종이 되셨다.

아내는 나의 정신적 동반자 이상이다. 아내는 든든한 신앙의 동반자이며 인내자이며, 희생이 무엇인지 가르쳐준 사람이다. 지금 생각하면 하나님은 교도소 특수선교를 위해 모든 것을 갖춘 집사람을 준비시켰다. 교도관으로 일하면서 타오는 급여 대부분을 전도를 위해 썼지만 아내는 한 번도 불평하지 않았다. 사실 내 월급으로는 생활을 할 수 없었다. 아내는 피아노 교습을 하면서 그 수입으로 근근이 생활비를 충당했다. 홍성으로 이사 왔을 때는 거의 모든 예배와 행사에 참여하며 사역을 했다. 그러던 아내에게 일이 터졌다.

정리=신상목 기자 smshi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