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돋을새김-서완석] 스포츠맨십과 긍휼함의 사이

입력 2015-02-03 02:25

크게 이겼다고 징계를 받다니. 미국 여고 농구 경기에서 큰 점수차로 이긴 감독이 징계를 받았다는 최근 외신 보도는 언뜻 이해가 되지 않았다. 지난달 초 미국 캘리포니아주의 아로요 밸리 고교와 블루밍턴 고교의 경기에서 아로요 밸리 고교는 161대 2라는 엄청난 점수차로 대승을 거뒀다. 하지만 승장 마이클 앤더슨 감독에게 돌아온 것은 찬사가 아니라 2경기 출장정지 처분이었다. 지역 리그가 그에게 내린 징계 사유는 “지나치게 많은 점수차로 이긴 것은 스포츠맨십에 어긋난다”는 것이었다. 앤더슨 감독은 “상대에게 망신을 주려는 의도가 없었고 후반에는 주전을 모두 뺐다”고 항변했지만 징계는 철회되지 않았다. 패한 블루밍턴 고교 데일 정 감독은 “상대팀 감독은 공격과 수비를 가르치는 데는 훌륭한 지도자이지만 윤리적인 면에서는 잘 모르겠다”고 꼬집었다. 미국의 또 다른 농구경기에서 주의력이 산만한 학생들로 구성된 팀에게 100대 0으로 이긴 팀 감독이 해임된 사례도 있다.

최선보다 상대에 대한 배려가 우선

승리 지상주의에 길들여진 스포츠 문화에서 승장이 징계를 받거나 해임된 이유는 쉬 납득하기 어려웠다. 서양의 기사도 정신, 신사도에서 비롯된 스포츠맨십은 비록 상대가 약팀이라도 최선을 다해 경기에 임할 것을 주문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이 상대에 대한 존중과 예의라는 것이다. 스포츠맨십의 요체는 공정하게 경기에 임하고, 비정상적인 이득을 얻기 위해 불의한 일을 행하지 않으며, 항상 상대편에게 예의를 지키고, 승패를 떠나 결과에 승복하는 것이다. 겸손한 승리자, 당당한 패배자가 되고 상대에 대한 인간적인 동정심을 갖는 것도 스포츠맨십의 주요 덕목이다.

하지만 아로요 밸리 고교 선수들은 감독의 지시대로 경기 내내 풀 코트 프레싱으로 상대를 압박했다. 블루밍턴 고교가 상대 코트로 넘어간 것이 4∼5회에 불과할 정도로 일방적인 경기였다. 전반전 점수가 104-1이었으므로 진 팀의 2점은 자유투로 넣은 것이었다. 최선을 다했음에도 이 경기가 비난을 받은 것은 바로 상대에 대한 배려가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약자를 불쌍히 여기고 함께 아파하는 마음, 즉 긍휼함은 스포츠맨십의 가장 중요한 덕목임을 감독은 가르치지 않은 것이다.

‘대접받고자 하는 대로 남을 대접하라’

스포츠를 넘어 상대에 대한 무례는 도처에 도사리고 있다. 국내외를 막론하고 시도 때도 없이 벌어지는 각종 문제와 갈등은 대부분 이 같은 배려 부족과 긍휼함 결여로 야기되는 측면이 많다. 최근 테러를 당한 프랑스 시사 풍자 잡지 샤를리 엡도 사태도 한 예다. 상대가 소중히 여기는 가치를 표현의 자유란 이름으로 훼손하는 것은 예의가 아니다. 혹자는 이번 사태를 표현의 자유를 내건 서구와 종교적 숭고함을 지키려는 이슬람의 문화충돌로 얘기하고 있지만 나의 자유만큼 상대가 지키려는 가치도 소중한 법이다. 나의 자유로 인해 아파했을 상대를 배려했다면 테러는 애초부터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예로부터 선인들은 역지사지(易地思之)라는 말로 배려의 방법을 구체적으로 가르쳤다. 논어 위령공편에는 ‘내가 하기 싫은 일은 남에게도 시키지 말라(己所不欲 勿施於人)’고도 했다. 성경은 좀더 적극적이다. ‘남에게 대접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마7:12)’고 했다. 배려에 관한 한 성경은 최고의 교과서다. 성경 곳곳에 긍휼이란 단어가 넘쳐난다.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마5:7)’, ‘긍휼을 행하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긍휼 없는 심판이 있으리라 긍휼은 심판을 이기고 자랑하느니라(야2:13)’. 만약 아로요 밸리 고교가 상대를 긍휼히 여겼다면 어떤 경기를 했을까.

서완석 체육전문기자 wssuh@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