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여덟살 동갑, 男피겨 ‘김연아 신화’ 쓸게요

입력 2015-02-03 02:47
사진=곽경근 선임기자

라이벌 관계는 어느 분야에나 있지만 승패가 명확히 갈리는 스포츠 세계에서는 더욱 두드러지기 마련이다. 18살 동갑내기 라이벌 이준형과 김진서의 경쟁은 한국 남자 피겨스케이팅의 발전을 이끌어가는 원동력이 된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지난 29일 서울 태릉실내빙상장에서 만난 두 선수는 “라이벌은 서로를 자극하는 큰 원동력이 된다”며 “우리 때문에 남자 피겨에 대한 관심도 늘고 선수층도 두터워졌으면 좋겠다”고 입을 모았다.

이준형은 ‘포스트 김연아’ 박소연을 가르치는 오지연(49) 코치의 아들로 태어나 어릴 때 자연스럽게 피겨에 입문했다. 탄탄한 스케이팅 기술과 섬세한 표현력을 갖춘 그는 주니어 시절부터 기대주였다. 특히 2011년 국제빙상경기연맹(ISU) 주니어 그랑프리 6차 대회에서 동메달을 따내 한국 피겨계를 흥분시켰다. 당시 주니어와 시니어 통틀어 한국 남자 선수가 그랑프리 시리즈에서 따낸 최초의 메달이었기 때문이다. 이준형은 또 이듬해 인스부르크 유스 올림픽에서도 4위에 오르며 국제무대에서 경쟁력을 인정받았다.

하지만 이준형은 성장통으로 한동안 슬럼프를 겪었다. 피겨 선수들은 10대 중·후반 키가 크고 몸무게 늘면서 점프를 제대로 뛰지 못하거나 그에 따른 부상을 겪는 경우가 적지 않다. 이준형 역시 남자 피겨에서 기본으로 통하는 트리플악셀(3회전반) 점프를 제대로 성공시키지 못해 한동안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이준형이 부진한 동안 김진서가 2012년을 기점으로 급부상했다. 김진서는 이준형에 비해 다소 늦은 나이인 초등학교 5학년 때 피겨를 시작했다. 그러나 중학교 입학 전에 트리플(3회전) 점프 5가지를 모두 소화하며 단번에 남자 피겨의 유망주로 떠올랐다. 2012년 주니어 그랑프리 3차 대회에서 동메달을 따내며 이준형에 뒤지지 않는 실력을 입증했다. 특히 이준형보다 먼저 트리플악셀 점프를 선보이며 우위를 점했다. 둘은 나이는 동갑이지만 김진서가 병치레로 초등학교를 1년 늦게 들어갔다. 그래서 이준형을 사석에서 형이라고 부른다. 김진서는 “매일 태릉에서 같이 훈련하면서 준형이 형이 어떤 기술을 성공시키면 나도 따라해 보려고 하는 등 치열하게 경쟁했던 것 같다”면서 “오히려 대회에 나가서는 서로 실수 없이 프로그램을 해내기를 기도한다”고 말했다.

라이벌인 두 선수는 성격과 스타일도 많이 다르다. 이준형이 섬세하고 침착한 성격이라면 김진서는 밝고 쾌활하다. 그리고 롤모델을 보면 그 차이를 극명하게 알 수 있다. 이준형은 스케이팅이 유려하고 예술적 표현력으로 일가견이 있는 제프리 버틀(33·캐나다)을, 김진서는 점프와 스핀의 교과서로 불린 스테판 랑비엘(30·스위스)을 꼽는다. 이번 시즌부터 두 선수는 우상으로부터 작품 안무를 받는 행운을 누리고 있다.

지난 3년간 엎치락뒤치락 경쟁을 벌여온 두 선수는 이번 시즌 의미 있는 성과를 냈다. 이준형보다 먼저 시니어 무대에 도전했던 김진서는 지난해 세계선수권대회에서 16위로 역대 한국 남자 선수 가운데 최고 성적을 기록했다. 당시 총점 202.80점으로 한국 남자 선수로는 처음 200점 고지를 돌파했다. 이를 바탕으로 2014-2015 시즌 그랑프리 시리즈의 2개 대회에 초청받았다. 비록 2개 대회 성적 모두 12명 중 9위에 그쳤지만 한국 남자 선수가 시니어 그랑프리 대회에 초청받은 것은 김진서가 처음이다. 김진서는 “처음에 그랑프리 1개 대회에만 초청받았다가 나중에 1개 대회가 추가되면서 준비를 제대로 못했다”면서 “비록 성적은 기대에 미치지 못했지만 큰 무대를 경험한 것이 도움이 됐다고 생각한다”고 밝혔다.

이준형 역시 한국 남자 피겨 역사를 새로 썼다. 그는 마지막 주니어 무대였던 이번 시즌 주니어 그랑프리 시리즈 1차 대회에서 한국 남자 선수 최초로 우승을 차지했다. 이어 7차 대회에서도 3위에 오른 그는 ‘왕중왕전’인 그랑프리 파이널에 출전하는 기염을 토했다. 비록 6명 출전자 중 6위에 그쳤지만 그랑프리 파이널에 출전한 것은 주니어와 시니어를 막론하고 김연아 이후 그가 처음이다. 이준형은 “지난 2년간 슬럼프를 겪었는데 라이벌이자 친구인 김진서가 좋은 모습을 보이는 것을 지켜보며 많은 자극을 받았다”면서 “이번 시즌을 앞두고 기술적인 부분을 많이 연습한 것이 주효했다”고 말했다.

국제 대회에서 좋은 성적을 거둔 두 선수가 맞대결을 펼친 것은 국내 대회에서다. 지난해 12월 열린 국내 랭킹 대회와 1월 종합선수권대회 모두 이준형이 김진서에 간발의 차이로 역전 우승을 차지했다. 10∼15일 서울 목동아이스링크에서 열리는 사대륙선수권대회에서 두 선수는 다시 한번 맞대결을 펼친다. 두 선수는 “최근 우리들을 알아보고 격려해주시는 분이 많이 늘어난 만큼 부담감도 더욱 커졌다”면서도 “이번 대회에서 쇼트와 프리 모두 실수 없이 선보이고 싶다”고 말했다.

3월 중국 상하이에서 열리는 세계선수권대회를 끝으로 이번 시즌을 마치는 두 선수는 다음 시즌 전까지 쿼드러플(4회전) 점프를 완성시키는 것이 목표다. 두 선수 모두 쿼드러플 점프 연습은 하고 있지만 아직 선보이고 있지 않다. 남자 피겨의 경우 쿼드러플 점프를 구사해야 세계 정상권에서 경쟁할 수 있다. 세계랭킹 1위인 일본의 하뉴 유즈루가 300점 돌파를 목표로 하는 상황에서 200점대를 넘긴 두 선수가 쿼드러플 점프를 구사해야 200점대 후반의 점수를 받을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둘은 “우리의 궁극적인 목표인 2018 평창동계올림픽까지 계속 성장해 나갈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다짐했다.

장지영 기자 jyja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