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공개된 이명박 전 대통령의 회고록에는 남북관계에 관해 그동안 알려지지 않았던 비사들이 상세하게 서술되어 있다. 5년 임기 중 남북 정상회담 개최를 위해 다섯 차례나 접촉이 있었으며 그때마다 북측의 무리한 요구 때문에 무산되었으며, 천안함 폭침이나 연평도 포격 이후에도 남북 간 고위 접촉이 있었으나 북측의 무모한 요청으로 파탄에 이르렀다는 비사들은 충격적이다.
북한은 이처럼 과도한 요구를 우리 남한에 대해서만 하는 것은 아니다. 역사적으로 냉전시기에는 중국과 러시아를 상대로 소위 등거리 외교를 적절히 구사하면서 이득을 취했다. 탈냉전기에는 미국을 상대로 통미봉남 전략으로 이득을 극대화하기도 하고 남한을 사이에 두고 중국과 러시아, 미국과 일본을 적절히 자극해 공짜 이득을 얻었다. 지정학적으로 또는 약소국으로서의 지위와 전략적 강점을 최대한 활용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이 전 대통령의 회고록에서 보면 결국 성공하지 못하면서도 계속 공짜로 모든 걸 해결하려 하는 시대착오적 행태를 계속하는 데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빨치산 보급투쟁의 객기 아직 남은 탓
첫째, 북한은 출범 때부터 김일성을 중심으로 소수의 빨치산 게릴라들이 주도했다. 이들은 항일 무장투쟁이라는 거창한 구호에 함몰되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보급투쟁의 이름으로 행동했다. 이들이 광복 후 북한에 들어와 정권을 잡았을 때도 러시아 군정 당국의 특별한 배려 속에 각종 편의를 제공받았고, 탈냉전 후에는 미국이나 국제사회를 상대로 핵 문제로 위기를 고조시키면서 반대급부로 각종 이권을 챙기는 새로운 형태의 보급투쟁을 벌였다. 남북관계에 임하는 북한의 자세에서도 빨치산 보급투쟁의 객기가 여전히 서려 있다.
둘째, 북한은 냉전시기 사회주의 국가들 사이에 운영되던 경제협력의 수혜를 많이 받았던 나라다. 6·25전쟁도, 전후 복구사업도 공산권 국가들로부터 많은 원조를 받았으며 북한 스스로는 자력갱생 구호를 높이 외치고 있으나 사실은 공산권 국가들과 조총련 등 해외 친북단체로부터 유무상통의 구실로 얻어낸 성과였다. 공산권 붕괴 후 북한은 남한을 상대로 민족 간 유무상통을 내세워 정상적인 거래를 무시한 채 일방적인 요구를 서슴지 않아 왔다. 유무상통의 좋은 의도와 달리 유무상통을 구실로 뻔뻔하고 무책임한 의존적 자세가 뿌리깊이 자리잡았고 이는 김정은 시대에 와서도 변함이 없다.
대북접촉에 더욱 신중 기해야
셋째, 북한의 파렴치하고 과도한 요구의 배경에는 탈냉전기인 지난 20여년간 남북관계에서 형성된 과잉 기대에 따른 악벽폐습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북한은 자신들의 잣대로 남한을 평가하고 남북관계를 주도하려 했다. 대화와 같은 수단을 목적화하고, 협박을 통해 얻어냈기 때문에 비정상적인 남북관계가 형성되었다. 결과적으로 신뢰구축 없이 퍼주고 도발하는 악습이 형성되었다. 이 전 대통령의 회고록은 이러한 악벽폐습의 모습을 다시 한번 적나라하게 보여주었다.
박근혜 대통령은 신년 기자회견을 통해 남북대화 재개 및 교류·협력에 강한 의지를 표명하였다. 남북대화를 재개하면 5·24조치 문제를 비롯해 금강산 관광 재개 등 새로운 경제협력 등을 논의할 수 있음을 내비침으로써 북한을 대화로 유인하려 하고 있다. 그러나 북한이 보급투쟁에 대한 기대나 유무상통에 대한 환상, 그리고 악벽폐습을 버리지 않는 한 남북대화가 재개되더라도 남북관계가 정상적으로 운영되기는 사실상 어렵다. 더구나 북한은 그들이 먼저 요구하고 받아 챙기면서도 우리가 먼저 유인하고 제공했다는 적반하장의 선전전을 거리낌 없이 하는 집단이다. 유감스럽게도 4년차에 접어든 김정은 정권도 이와 다르지 않음을 감안해 대북 접촉에 신중을 기해야 할 것이다.
유호열 고려대 북한학과 교수
[한반도포커스-유호열] 북한은 왜 공짜로 달라고만 할까
입력 2015-02-02 02:30